정열의 플라멩코
2000년대 중반, 나는 아르헨티나 탱고에 푹 빠져 있었고, 해외의 다양한 페스티벌과 워크숍에도 자주 참석했다. 아시아 쪽 행사는 주말을 이용해 참석할 수 있었지만, 유럽 쪽 행사는 최소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 당시 바쁜 업무로 휴가를 내는 것도 쉽지 않아 비교적 오랜 기간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그중 스페인에서의 추억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탱고를 시작하기 전 대학에서 클래식 기타를 배울 때부터 스페인에 대해서는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클래식기타 작곡가 ‘프란시스코 타레가’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고, 그가 작곡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내가 자주 연습하던 곡이었다. 스페인에 간 김에 그라나다 지방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은 꼭 방문하고 싶었다.
마드리드에 도착 후 먼저 탱고 페스티벌에 참석했다. 유럽에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탱고 댄서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만나기 힘든 유명한 댄서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페스티벌에 참석한 스페인 사람들에게 마드리드에서 꼭 해야 할 일들을 물어보았다. 그들은 유명한 파에야 식당과 플라멩코 공연 장소에 갈 것을 추천해 주었다.
저녁에 플라멩코 공연이 있는 식당을 예약해 갔다. 식사가 끝나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무용수들과 연주자들이 무대에 올라 공연을 시작했다. 사실 이전에 한국에서 플라멩코 공연을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그다지 큰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래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공연은 달랐다. 기타, 캐스터네츠, 애환이 담긴 듯한 노래, 그리고 무용수들의 발놀림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몽환적이고 주술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긴 시간 동안 지루할 법도 했지만, 나는 그 긴 공연 내내 집중한 채 무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몸짓과 음악이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울림을 주었고, 호텔로 돌아와서도 그 여운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마드리드에서의 일정이 끝난 후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을 방문했다. 유럽뿐만 아니라 이슬람 양식까지 섞인 독특한 분위기의 장소를 보고 시간을 내서 와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곡가 타레가가 무슨 생각으로 작곡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기타곡이 가지고 있는 애잔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스페인의 끝자락 말라가를 마지막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플라멩코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여러 곳의 학원을 알아본 결과, '조광'이라는 원로 무용수가 가장 신뢰가 갔다. 선생님이 계시는 서초동 연습실로 찾아갔고, 본격적으로 플라멩코를 배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이미 70을 훌쩍 넘기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매년 무대에 설 정도로 열정적이셨다. 나이가 들어서도 열정을 잃지 않는 모습에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처음 배울 때는 그저 독특한 리듬과 화려한 몸짓, 그리고 탭댄스와는 다른 현란한 발놀림에 이끌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플라멩코가 담고 있는 이국적인 분위기와 감정적 깊이에 매료되었다.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면서 인생의 고난과 기쁨, 사랑과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조광 선생님은 가르칠 때마다 나를 아껴주셨고, 가끔은 너무 과도한 친절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1년 정도 배웠을 때 선생님은 나에게 함께 공연하는 것을 제안하셨다. 나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공연에 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남자 무용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무대에 서기로 했다. 다른 제자들에 비해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회사 일도 바빠 연습할 시간도 부족했다. 게다가 공연이 무슨 공연인지도 잘 몰랐다.
공연날이 다가와 공연 팸플릿이 나왔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 공연은 '무용, 무대예술 80년사'라는 이름으로, 한국 무용계의 전설적인 인물들이 모두 참여하는 행사였다. 게다가 장소도 세종문화회관이었다. 부담감이 컸지만, 중간에 빠질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연습을 계속했다. 공연 관련 기사도 신문에 나왔고, 저녁 9시 뉴스에서도 소개가 될 정도로 유명한 공연이었다.
“이번 공연에는 전통무용가 이매방 씨, 최승희의 제자인 김백봉 서울시무용단장, 한국무용가 강선영 씨를 비롯해 현대무용가 육완순 씨, 박인자 국립발레단장, 발레무용수 김주원, 장운규 씨 등 한국무용, 발레, 현대무용을 총망라한 170명이 출연할 예정이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공연 전날 회사 앞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불법 우회전 차량이 내 발을 밟고 지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발등이 심하게 부었지만, 선생님께서는 연습한 것이 아까우니 다친 발을 구르지 말고 무대에서 기본적인 동작만 맞춰 달라고 하셨다. 워낙 큰 무대였고 발의 부상으로 공연에 집중하는 것이 힘들었다. 공연을 마쳤지만, 실수를 많이 해 공연 후 선생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수고했다며 나를 격려해 주셨다.
시간이 지나 그때 찍었던 사진과 팸플릿을 보며 플라멩코가 줬던 열정을 가끔 생각해 본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는 않지만 조광 선생님이 진심으로 나에게 베풀어 주셨던 스승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고, 인생에 있어 진정한 열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는지 일깨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