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자유
2019년 12월, 나는 상하이로 갑작스럽게 발령받았다. 상하이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한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한 도시 봉쇄가 시행되고 있었고, SNS를 통해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았다. 우한 사람들은 격리로 인해 자유가 박탈된 일상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었고, 식량마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상하이 사람들은 인구 2,600만의 중국의 경제 도시인 상하이는 “결코 봉쇄될 수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2022년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다른 나라에서는 코로나에 대한 내성을 키우면서 점진적인 개방을 선택했지만, 중국은 우한에서의 봉쇄 정책 성공(?)의 영향으로 줄곧 ‘제로 코로나’ 정책을 고수했다. 외국과의 교류도 제한하고, 확진자가 1명이라도 생기면 바로 격리하는 정책으로 첫 2년은 다른 나라에 비해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다. 하지만, ‘오미크론’ 변이가 급속도로 확산되자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
2022년 3월 초, 나는 항주 출장을 계획했지만 상황은 날로 심각해졌다.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중국 정부는 도시 간의 이동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항주로 가기 위해서는 상하이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고, 24시간 이내에 음성이 확인되어야만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 있었다. 고속철을 타고 1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불안한 상황이라 회사 차량을 이용해 항주에 가기로 했다. 항주로 가는 고속도로는 모두 막혀있었고, 결국 출장을 포기하고 상하이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상하이의 확진자 수가 점점 증가하는 것을 지켜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2022년 3월 27일, 중국 정부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이유로 상하이에 봉쇄령을 내렸다. 정부는 제로 코로나를 목표로 삼아, 모든 인구를 대상으로 총 4일간 전수 검사를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4일이 지나도 봉쇄는 풀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확진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1주일 정도 봉쇄될 것이라 생각하고, 음식과 물을 준비했지만, 상황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점점 불안해졌다.
며칠 후 정부에서 제공한 음식이 도착했는데, 내용물은 신선하지 않은 야채와 상한 듯한 갈치, 털만 뽑힌 채 머리가 붙어 있는 닭 등으로 받아보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음식들은 먹을 수 없었던 반면, 다행히 회사에서 지원하는 구호 식량이 도착해 기본적인 식사는 해결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아파트 대표를 통해 공동 구매가 가능해졌다. 평소보다 비싸긴 했지만, 꼭 필요한 물품을 구매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맥주나 아이스크림은 소진이 빨라서 미리 신청을 해야만 했다.
매일 코로나 검사를 위해서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고, 그때마다 영화에서 보았던 수용소의 죄수들이 왜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되었다. 봉쇄 기간 동안 가족과 함께한 시간은 서로를 더욱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가끔 신문 기사에서 봉쇄 중 이혼을 고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았지만, 우리 가족은 다행히도 사이가 돈독해질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봉쇄가 끝나갈 무렵인 5월 중순부터 아파트 단지 내에서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고, 일부 확진자가 없는 아파트 주민들은 동네를 활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집에서 일하다 보니 회사에서 발생한 안 좋은 일까지 가족들이 알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봉쇄가 끝나갈 무렵 경기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나는 매출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원격 회의 어플을 통해 자주 회의하였고, 핸드폰으로 진행하다 보니 음질이 좋지 않아 스피커폰으로 진행한 적도 있었다. 하루는 상사가 매출 관련 문제로 나에게 고함을 질렀고, 순간 밖을 봤는데 가족들이 이미 듣고 난 상황이었다. 그때의 수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중국은 공산국가이지만, 상하이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코로나 패션’이 유행처럼 퍼지며, 코로나 검사를 받기 위해 집 앞 외출할 때 멋을 부리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30분 동안의 자유였지만, 온갖 화려한 옷과 풀 메이크 업으로 스트레스를 날리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봉쇄가 길어지자 주민들은 집집마다 냄비를 두드리며 불만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가끔 길가를 보면 코로나19 확진자들은 방진복을 입은 정부 요원들에 의해 차에 실려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열악한 시설에서 특별한 치료 없이 완치되어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아온 집은 소독약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불편함을 겪었다고 들었다.
6월 초, 봉쇄가 풀리고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그동안 잃었던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깨달았다. 2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나와 가족들은 상하이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고, 그 시절의 기억은 항상 내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봉쇄 기간 동안 나는 이러한 기억들과 경험들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과 일상의 작은 것들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단, 한 가지 좋지 않은 기억은 회사 일로 인해 가족들 앞에서 나의 자존심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