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호기심

먹고 마시는 것들

by 역마자

올해 말에 예정되었던 해외 주재원 일정이 갑자기 취소가 되며, 한 달 정도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내가 먹고 마시는 것들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계속 커피, 와인, 칵테일, 그리고 각종 음식들을 먹으면서 그 맛이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죽을 때까지 계속될 행위이지만 아무 생각도 없이 배고픔이나 갈증 해소만을 위해 일평생 무의식적으로 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갑자기 인터넷을 뒤져 내가 배울만한 것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냥 수업만 들으면 귀찮아서 포기할 가능성이 있어 자격증까지 발급해 주는 과정을 찾았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내일 배움 카드’를 발급받으면, 국가로부터 수업료 중 일부를 지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일 배움 카드로 신청 가능한 수업이 생각보다 많았다.


처음으로 선택한 것은 내가 매일 마시는 커피 자격증이었다. 나는 특정 브랜드의 커피를 좋아한다. 보통은 스타벅스나 커피빈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이탈리아 브랜드인 ‘일리커피’를 좋아한다. 홍대역 근처에 있는 학원을 등록하고 커피 역사, 그리고 유명한 커피 생산지를 배웠고 수업 시간에 규정대로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법과 라테 하트를 그리는 법을 배웠다. 커피와 우유 크림 등 배합에 따른 메뉴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좀 더 다양한 커피를 시도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 수업 시간에 강사님이 다른 종류의 커피콩을 가지고 와서 산지, 로스팅 정도를 알려줬고 맛을 보게 했다. 커피 향을 맡고 어떤 향인지 맞추는 것은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나름 후각이 예민해서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냄새향 구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실기 시험은 시간 안에 에스프레소 한잔과 하트가 그려진 라테를 제출하는 것이었고, 다행히 학생 수가 많지 않아 수업 시간에 연습을 많이 한 덕분에 합격을 할 수 있었다.

coffeecer.jpg 바리스타 자격증

몇 주 쉬고 영등포 구청 부근에 있는 소믈리에 학원을 등록했다. 첫 시간에 이렇게 많은 포도 산지와 이렇게 많은 포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몹시 당황스러웠다. 나도 또래 중 와인을 많이 마셔본 편이지만, 탱고를 추면서 마셨던 아르헨티나 산 말백과 미국에서 근무하면서 먹었던 나파밸리 와인들로 제한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사님이 설명해 줄 때 집중을 하면서 들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같은 품종이라도 떼루아 즉 환경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말에 어릴 적에 읽었던 춘추전국시대 일화인 "귤나무는 회수(淮水) 남쪽에서 자라면 귤이 열리지만 회수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열린다 “라는 고사가 생각났다. 여기서도 제일 어려웠던 것은 와인 향을 구분하는 거였다. 과일향도 숙성된 과일향이나 풋과일향, 꽃향기, 오크향 등 온갖 종류의 향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름 후각에 예민해서 내 코가 개코인 줄 알았으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코임을 알게 되었다. 같이 수업을 듣던 젊은 친구들은 오히려 잘 맞추는 편이었는데, 놀랍게도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종류의 와인들을 많이 경험해보았다고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마시기만 한 사람과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경험을 한 사람의 결과가 그렇게 큰 차이를 만들었던 것이다. 살아온 나이에 상관없이 누가 관심 있게 오래 했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내 또래들은 과거를 이야기하는데, 같이 배운 젊은 친구들은 주로 계획을 이야기해서 나에게 많은 자극을 주었다. 하지만, 미국 와인에 익숙해있는지 테이스팅 할 때 캔델 잭슨이나 로버트 몬다비 계열이 맛있게 느껴진다. 살아온 세월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요즘은 주말에 칵테일을 배우고 있다. 이것도 자격증이 있는데, 조주기능사라고 불린다. 필기시험에는 조주라는 이름에 맞게 모든 술과 음료에 관련된 역사와 특징에 대한 문제가 나오고, 칵테일에 들어가는 재료나 제조법, 그리고 매장 관리 문제도 출제된다. 와인을 배웠을 때에도 수많은 포도 품종 및 재배하는 지역, 특징에 대해 배우고 맛과 향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조주는 더 심한 것 같다. 위스키, 데낄라를 제외한 진, 럼, 보드카, 브랜드는 지금까지 잘 맛보지도 못한 종류였고, 이것 외에 생전 처음 보는 다른 종류의 알코올 음료들도 많았다. 실기 시험에서는 40가지 칵테일 중 3종류의 칵테일을 지정받아 시간 내에 제출해야 한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것을 배우다 보니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을 깨닫는다. 더군다나 요즘은 새로운 것들이 계속 나와 일생을 배우면서 살아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


어떤 부분에서는 나이와 경험이 큰 자산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부분에서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예를 들어, 내가 향에 대해 공부할 때 젊은 친구들이 나보다 훨씬 빨리 향을 구분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향을 기억하고 표현하는 것을 보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더 많은 와인과 칵테일을 다양하게 경험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향과 맛을 체계적으로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온 것이다. 나는 오랜 기간 그저 맛을 느끼고 즐기기만 했을 뿐, 그것을 분석하고 기록으로 남기거나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관심 분야에 대해 깊이 파고들며 배우고 성장하고 있으며, 그 열정과 빠른 학습 능력은 정말 감탄스러웠다. 이제는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들의 신선한 시각과 다양한 경험은 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고,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되돌아보게 했다. 예전에 보았던 신의 물방울이라는 일본 만화를 보면 와인을 한잔 마시면 울창한 숲이 눈앞에 펼쳐지며 온갖 과실향을 느끼면서 멋스럽게 설명하던데, 이번 생에는 힘들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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