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7은 행운의 숫자

by 역마자

2024년 11월 11일 나는 조주기능사 실기 시험을 보았다. 조주 기능사는 흔히 바텐더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가지는 자격증으로 칵테일을 잘 만들 수 있는지를 보는 시험이다. 필기는 술과 음료에 대해 객관식 문제로 나오고, 실기는 7분 안에 칵테일 3개를 만들어 제출하면 된다. 모두 60점 이상만 되면 합격이다.


시험을 볼 때면 나는 항상 그날의 운세 점수를 체크한다. 특히, 학업 관련 운세를 자세히 살펴본다. 당일 아침의 전체운은 90점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나 학업운이 ‘예상치 못한 상황이 학업운을 방해합니다. 다만 일시적이므로 흔들림 없이 빠른 시일 내 페이스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쓰여 있어 뭔가 꺼림칙했다. 이건 시험운이 좋다는 것인지 나쁘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새벽에 일어나서 간단히 커피를 마시고 집을 떠났다. 나의 행운을 위해 일부러 7번 개찰구를 통해 지하철역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막 떠나려던 지하철을 가까스로 탈 수 있었다. 중간에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떨어져 위험이 있었으나 얼른 주웠고 다행히 핸드폰은 무사했다. 들어가니 자리도 있었고,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험장에 도착하니 자리에 번호가 적혀 있었다. 7번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의 행운을 위해 그 자리에 앉았다. 조금 있으니 사람들이 대기실에 꽤 찼다. 한 명씩 이름을 호출하면 신분증을 보여주고 탁구공 번호를 뽑는 방식이다. 탁구공 번호가 시험 보는 순번이 되는 것이다. 내 이름이 호출되자 이번에도 7번을 뽑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럴 수가…7번이다. 오늘은 뭐가 돼도 되려 나 보다고 생각을 했다.


한 번에 3명씩 실기를 보기 때문에 조금 기다렸다 바로 시험을 봤다. 기다리고 있는데 시험 안내자가 또 탁구공을 들고 왔다. 이번에도 하나 뽑으라고 한다. 설마 하며 하나 뽑았다. 또 7이다. 오늘은 럭키 7의 날.. 룰룰루 하면서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실기 시험장에 입장했다. 감독관이 간단하게 규칙을 설명하고 조금 있다 시험을 시작했다. 대기 시간에 완벽하게 암기했다고 생각했던 레시피가 띄엄띄엄 머리에서 출력이 된다. 7분 안에 3개 만들어야 하는데.. 생각해 보니 또 7이다.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시험장 규칙상 시계와 핸드폰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어 답답했다.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움직이긴 했는데, 이성이 아니라 본능에 이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으로 아 X발.. 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학원에서 남들보다 잘했던 나의 B-52 칵테일은 경계선이 상당히 모호했고, 오렌지를 슬라이스로 잘라야 하는데 너무 두껍게 잘라졌다. 갑자기 감독관이 말한다. 30초 남았습니다. 제출을 못하면 아예 실격이라 서둘러 만들어 끝냈다. 이후 잠시 정적...

b52.jpg 조주기능사 실기 학원에서 만들었던 B-52

한 감독관이 7번 수험생인 나에게 질문한다. 왜 진(Gin)이 아니라 럼(Rum)을 넣으셨어요? '아뿔싸, 맨날 주의하였던 싱가포르 슬링이라는 칵테일에 럼을 넣었다니…' 나와있는 병을 보니 진짜 럼이다.

"죄송합니다. 병이 비슷하게 생겨 저도 모르게 잘못 넣었습니다."

정말 구차했다. 옆에 있는 감독관도 한마디 한다.

"거기 오렌지 슬라이스 넣어야 하는데, 너무 두꺼워요. 그 정도면 슬라이스(Slice)가 아니라 웨지(Wedge)에요."

울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 먹고 울면 추해 보여서 울지도 못했다. 또 다른 지적 2개를 더 듣고서야 평가가 끝났다. 다행히도 실격이라는 말은 안 들었다. 결과를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8번 수험생은 가벼운 지적 하나 당하고 통과. 맘이 답답해졌다. 학원에서는 잘했는데… 9번 수험생 차례가 되었다. 질문이 나보다 많은 것 같다. 금산이라는 칵테일을 만들라고 했는데, 재료를 2개 이상 잘못 썼다는 감독관의 평가가 끝났고 바로 이어 실격입니다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간 정적이 흘렀고, 9번 수험생은 크게 변명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지적질당할 때마다 '긴장해서 손이 떨려서 그런 것 같다', '병을 잘못 봤다'…등등 구차한 변명을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그는 나름 담담하게 대응하였다. 이러고도 떨어지면 발표날 술을 많이 먹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가가 모두 끝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늦가을의 길거리 풍경을 보았다. 몇 주 동안 바쁘게 이것저것 하느라 놓쳤었던 계절의 변화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었는데, 갑자기 늦가을이 되어 버렸다. 문득 어릴 적에 교과서에서 읽었단 운수 좋은 날이라는 소설이 생각났다. 소설 속 주인공도 계속되는 자그마한 행운에 즐거워했으나, 결국 큰 불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뭔가 찝찝한 소설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찝찝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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