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소나기

예측하지 못한 즐거움

by 모든행운이 너에게

둘째가 방학동안 써머스쿨을 다니게 되자, 그 기간동안 우리 부부에게는 저녁시간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초여름부터 게으른 저녁시간을 보내는 우리 부부의 이야기.

퇴근 후 샤워를 하고 저녁식사를 한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진다. 여름이라 지쳐서 그런 것 같다며 대충 정리를 하고 소파에서 양쪽 끝에 누워 쪽잠을 잔다. 쪽잠이라고 하지만 거의 1시간을 잔다. 식후 바로 자는 것이 건강에 해롭다고 들었는데, 이제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러고 나면 먹고 바로 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면하고자 동네 산책을 하러 나간다. 둘째를 데리러 가기 전 1시간 정도 걷는다.


게으른 루틴을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식곤증을 이겨내 보고자, 남편에게 식후 바로 산책을 가자고 제안했었다. 남편은 멀리 출장을 다녀온 날이라 피곤하니 혼자 짧게 다녀오라고 했다. 낮동안 비가 많이 와서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걷기 딱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복을 갈아입고 에어팟을 끼고,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동네를 걸었다. 혼자 걸으니 발걸음도 더 빨라지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으니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집에서 3km 정도 거리를 걷고 있는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건물 출입구로 뛰어들어갔다.

‘툭!, 툭!‘

‘투두두두두두두……. 쏴~~~~~~‘

순식간에 빗방울이 폭우로 변했다. 빗줄기가 사선이 되었다가 수직선이 되었다를 반복했다. 소나기가 잠잠해지면 그냥 맞고 가야겠다 생각하고 비 오는 풍경을 감상했다.

문득 국민학교 시절 비 맞고 집에 왔던 날이 생각났다. 소나기가 퍼붓고 있는데 우산을 챙겨 오지 않은 날이었다. 복도에서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이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 기다렸다. 그날은 유난히 혹시나 하는 마음이 버려지지 않았다. 친구들은 우산을 들고 온 엄마들의 손에, 혹은 옆집 아줌마손에 이끌리듯 사라지고 나 혼자 남았다. 그리고 1층 현관으로 내려갔다. 실내화를 신은 채 양말을 벗었다. 보통비가 아니라는 것을 예감했던 것 같다. 빗줄기가 떨어질 때마다 운동장의 흙이 파이는 것이 보였다. 빗줄기 하나하나 한참을 쳐다보다가 체념한 듯 천천히 걸어 나갔다. 단번에 옷이 다 젖었다. 빗줄기는 가늘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걸으면 걸을수록 머리도 아프고 빗물이 코로 들어가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번개가 치고 어둑어둑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물고랑이 여러 군데 파여있어서 휩쓸려 갈 것 같았다. 공포스러운 하굣길이었다. 비에 쫓기듯 집에 도착했다. 엄마가 오는 길이 힘들었겠다며 우산을 옆집언니에게 부탁했는데 나와 서로 길이 엇갈린 것 같다고 하셨다. 집에 도착한 안도감 때문인지 빨리 옷을 갈아입고 싶어서 인지 아무렇지 않은 척 했었다. 그땐 왜 그랬을까. 오는 길이 무서웠다고, 비 오는 날에는 마중 나와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비가 많이 오는데 어디 있어?"

"나 00 건물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고 있어"

"비가 바로 그칠 것 같지 않은데, 어디 있는지 메시지로 보내 갈게!"

"ㅇ ㅓ...." 대답하기 전에 끊겼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남편의 차가 도착했다.

"남편이 조금 쉬겠다는데 틈을 안주네 당최~어?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야 기다리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네 민망하게"

"이왕 나온 거 카페라도 들렀다 들어갈래?"

"괜찮을까? 운전하기 좀 어려운 날씨인데, 안 피곤하면 나는 너무 좋지"

비 오는 날 돌아다니는 건 왠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듯한 은근한 스릴이 있다. 근처 사는 사촌을 불러 함께 카페로 향했다. 차에서 내려 카페 들어가는 짧은 순간조차 옷이 젖을 정도로 비가 세차게 내렸다. 이런 날씨라면 거절할 법도 한데, 사촌동생은 군말 없이 나와주었다. 우리는 주황빛 불이 은은하게 비추는 자리에 마주 앉았다. 오래된 엔틱가구가 풍기는 편안한 분위기, 유리컵에 담긴 따뜻한 자몽차의 향, 그리고 특별할 것 없는 수다 속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움이 즐거웠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마중 나온 남편, 폭우가 쏟아져도 부르면 나와준 사촌동생 덕분에 비 오는 날의 좋은 기억이 하나 생겼다.

'여름에는 비를 한 번쯤 맞아줘도 좋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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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