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예약, 가벼운 약속

by 은나무


첫 대면 후 사흘.

매장은 평소처럼 분주했지만, 내 하루는 조금 달랐다. 가위를 드는 순간마다 첫 손질 때의 긴장이 손끝에 남았다. 화면 속 인물이 아니라 내 의자에 앉았던 손님으로서의 강도현. 그 차이가 생각보다 컸다.


점심 무렵, 리셉션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실장님, 영화사 쪽에서 연락 왔어요. 강도현 씨 다음 주 화보 촬영 전, 간단 트리밍 요청이래요. 시간 가능하세요?”


나는 스케줄표를 훑었다. 빈칸이 있었지만 단번에 “가능합니다”라고 답하진 않았다. 스스로 정한 규칙이 있었다. 일은 일. 마음이 먼저 움직이면 손이 흔들린다.

“조정해서 알려드릴게요.”


메신저 알림이 동시에 떴다. 매니저 번호였다.

[강도현 배우님, 지난번 컨디션 너무 좋았다고 전해달래요. 실장님 일정 편한 때로 맞출게요.]

정중한 문장이었고, 지나치지 않았다. 그 점이 오히려 마음을 놓이게 했다.




예약일.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오며 모자를 벗었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어서 오세요. 오늘은 앞머리 텍스처만 정리할게요.”


흰색 케이프를 둘러주다 그의 손목시계에 끼였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프 끝이 살짝 당겨졌다.

그가 먼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이상하게 실장님 앞에만 오면 이런 실수를 하네요.”

저도 배우님 앞에서 실수한 적 있어요. 서로 한 번씩 한 걸로 정리하죠.”

둘이 동시에 웃었고, 준비실에 잠깐 고요가 흘렀다.

억지로 만든 여유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여유였다.


나는 텍스처를 세밀하게 정리했다. 조명을 받으면 뭉쳐 보이기 쉬운 탑 라인, 카메라에서는 과장되 보이는 사이드의 볼륨. 설명을 덧붙이자 그는 거울 너머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서 왜 ‘윤서 실장님’ 찾는지 알 것 같아요. 실장님 말이 설득력이 있어요.”

칭찬이었지만 과하지 않았다. 그게 더 위험했다. 마음이 급해지지 않도록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스프레이를 뿌리려는데, 노즐이 잠깐 헛돌았다. 허공으로 ‘칙—’.

그가 낮게 웃었다. “오늘은 서로 ¹ 한 번씩이네요.”

“네, 상부상조.”

농담을 받아치고 나서야 내 표정이 조금 풀렸다.


마무리 직전, 그가 작은 에코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제 스태프가 주고 가던데, 하나 남아서요. 프로틴 바. 점심 못 드시는 날 많다면서요.”

나는 손을 멈췄다. 부탁이나 선물이라기엔 너무 사소하고, 그래서 더 가벼웠다.

“고마워요. 그럼 저도 하나.”

서랍에서 작은 헤어 핀 세트를 꺼내 건넸다. 촬영장에서 잔머리 정리용으로 스태프들이 늘 챙겨가는 것.

“스태프분들 주셔도 되고요.”

그는 핀을 받아 들며 미소 지었다. “교환 완료.”




시술을 마치자 그는 케이프를 벗고 거울 앞에 섰다.

“좋습니다. 오늘 촬영 끝나고 바로 방송국 이동이라…

혹시 새벽 로케 잡히면, 그때도 짧게 시간 받을 수 있을까요? 십 분이면 돼요.”

바로 “네”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케이프를 정리하며 원칙을 확인하듯 말했다.

“스케줄표 보고 가능 시간 드릴게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자 드릴게요, 윤서 씨.”


호칭이 살짝 달라졌다. ‘실장님’에서 ‘윤서 씨’. 업무 범위 안에서 허용 가능한 거리감. 그 정도면 괜찮았다. 아마도.


그가 나가고 준비실이 조용해졌을 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촬영 끝나면 메신저 드릴게요. 혹시 되면 수요일 새벽 5:40, 한남동 ○○스튜디오. 십 분이면 충분합니다.]

메시지 끝에는 위치 핀이 깔끔히 찍혀 있었다.


새벽 5:40.

나는 벽시계를 보았다. 이 일에서는 종종 있는 시간.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한 박자 먼저 반응했다.


‘새벽이면… 매장이 열기 전. 일만 하고 돌아오면 된다.’


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스케줄 확인 후 회신 드릴게요.]

보내고 나서야 손끝의 긴장이 풀렸다. 급하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는 감각. 그 정도 속도가 좋았다.


문을 나서려는데, 리셉션이 눈을 반짝였다.

“실장님, 방금 오신 분… 화면이랑 똑같더라고요.”

“화면은 조명과 편집이 만들고, 현실은… 디자이너 손이 만들지.”

내가 웃자, 리셉션도 웃었다.


퇴근길, 가방 속에서 프로틴 바가 손끝에 걸렸다. 별것 아닌 무게가 오늘의 기분을 살짝 기울였다.

집 앞 골목에서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늦은 시간 죄송해요. 내일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단 한 줄. 공손하고 단정했다. 나는 이 단정함이 고맙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서두르지 않게 해 주니까.


창문을 열자 새벽 공기가 미리 흘러들어오는 것처럼 서늘했다.

나는 알람을 추가했다. 수요일 4:30 AM.

그리고 스스로에게, 아주 조용히 말했다.

“일은 일. 하지만 설렘을 금지한다고 사라지진 않는다.”

이전 05화현실에서 마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