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촬영이 끝나고, 커튼 사이로 스며든 빛이 스튜디오 바닥에 길게 흘렀다.
윤서는 짧은 숨을 고르며 가위를 놓았다.
오늘 콘셉트는 화보. 카메라는 도현의 옆선을 예리하게 잡아낼 거라, 헤어의 미세한 각도가 결정적이었다.
“실장님, 탑 라인 반 밀리만 낮춰볼까요?”
매니저가 모니터를 보며 속삭였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 기계가 돌아가고, 조명이 한 번 더 켜졌다. 순간 세찬 바람에 도현의 앞머리가 계획보다 크게 들렸다. 윤서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림자처럼 그 라인을 눌러 잡았다. 거리가 딱, 숨 한 번이면 닿을 만큼.
“움직이지 마세요. 지금 이 각도… 좋아요.”
자기 목소리가 조금 낮아진 걸, 그녀 자신이 먼저 눈치챘다.
도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가, 금세 미소로 정리됐다.
낮고 맑은 목소리.
“실장님, 방금 말투… 거의 디렉터셨는데요.”
“오늘은 제가 헤어 쪽 감독이에요.”
“그럼 전, 따라갈게요.”
바람이 멈추고, 셔터가 연속으로 떨어졌다.
찰칵, 찰칵—.
대기 시간, 종이컵에 라테를 받아 나오는데 누군가 살짝 어깨를 스쳤다.
도현이었다. 검은 후드에 땀은 말랐고, 목선이 깔끔했다. 유명세가 몸에 붙은 사람 특유의 여유, 그런데 웃을 때만큼은 생각보다 선했다.
“실장님.”
“네?”
“아까, 그 손.”
그는 아까 그녀가 앞머리를 고정하던 손짓을 공중에 그려 보였다.
“카메라 앞에서 누가 저렇게 가까워지면, 보통 흔들리거든요.”
“흔들렸나요?”
“아니요. 더 집중됐어요. 이상하죠?”
윤서는 라테 뚜껑을 꼭 눌렀다. 심장 박동이 뚜껑 비닐처럼 팽팽했다.
포토그래퍼가 모니터를 돌려 보여줬다.
바람에 결이 살아난 탑 라인, 날카롭지만 부드러운 옆선, 그리고 눈동자에 얇게 감긴 빛.
“헤어가 딱 걸렸어요. 오늘 컷, 잡혔습니다.”
옆에서 스태프 둘이 속삭였다.
“헤어 실장님, 실력 미쳤다.”
“근데 둘, 좀 분위기 있지 않아?”
말끝이 귓바퀴를 스쳐 갔다. 윤서는 컵을 들어 올렸다.
라테 향이 진했다.
나, 예전에 이 사람 팬카페에서 스틸컷 모으던 사람이야.
그 사실이 순간, 뼈처럼 존재감을 드러냈다. 화면 속 인물로만 보던 얼굴이, 내 손끝에서 현실이 되는 일. 설렘은 현실에서 더 무모했다.
쉬는 시간, 도현이 슬며시 다가왔다.
“실장님, 폰 케이스 예쁘네요.”
그가 시선을 떨어뜨린 곳엔 오래전 드라마 포스터 조각이 있었다. 윤서가 팬사인회 못 간 대신, 포스터 모서리를 잘라 투명 케이스 안에 넣어 둔 조각.
그녀는 황급히 케이스를 뒤집었다.
“이건… 그냥 오래돼서 못 뺐어요.”
도현이 웃었다.
“좋아요. 그런 오래된 거.”
“뭐가요?”
“오래 좋아해 온 마음. 새로 생긴 마음보다 믿을 만하잖아요.”
그 말이 묘하게 오래 남았다. ‘팬이었던 마음’을 인정해 주는 태도. 가볍지 않았고,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았다.
적정 온도의 솔직함.
촬영 막바지, 셋이 어수선한 동선에 살짝 엉켰다. 포토그래퍼가 몸을 돌리다 스탠드를 건드렸고, 무게중심이 기우는 순간,
“위험.”
윤서가 먼저 스탠드를 붙잡았지만, 반대쪽 바닥에 있던 케이블이 발목을 스쳤다. 휘청.
도현의 손이 정확히 그녀의 팔꿈치를 받쳤다.
넘어질 듯, 말 듯. 한 박자 길어진 숨.
“괜찮아요?”
“네… 지금은요.”
“지금 말고, 내일도요.”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랐다. 짧지만 세게 박히는 농담. 유치하지 않게, 귀엽게.
스태프가 두 사람 쪽으로 시선을 주며 농담을 던졌다.
“두 분, 액션씬도 가능하겠는데요?”
윤서는 한 박자 빠르게 웃었다. 선을 긋진 않았지만, 괜한 선 긋는 척도 하지 않았다. 오늘의 답은 ‘피하기보단 함께 정리하기’.
촬영이 끝나자 소속사 매니저가 순간 SNS 스토리 각도를 검열하듯 둘의 동선을 정리했다.
“도현 씨, 차로 바로 이동하시죠. 실장님도 장비는 스태프가”
“그건 제가 들어요.”
도현이 말렸다.
“실장님 오늘 손 많이 썼어요.”
그리고 장비 가방을 자연스레 빼앗아 어깨에 걸었다. 유명인의 제스처답지 않은 소박함이 묘하게 섹시하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윤서는 오늘 처음 알았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콘크리트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도현의 발걸음은 느리고 안정적이었다.
“실장님.”
“네?”
“다음 주 팬 이벤트 리허설 들어가요. 비공개라 복잡하진 않을 거예요.”
윤서는 잠깐 숨을 멈췄다. ‘팬’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그녀를 기분 좋게 긴장시키는 트리거였다.
“혹시… 와줄 수 있어요? 스태프 패스로. 일처럼 와도 되고, 그냥 구경만 해도 돼요.”
“왜요? 헤어 체크 때문인가요?”
“그것도 있지만.”
그는 계단 난간에 팔을 얹고 고개를 기울였다.
날렵한 옆선의 미소.
“실장님이 무대 뒤에서 제일 먼저 웃는 얼굴이면 좋겠어서요.”
윤서는 대답을 미루지 않았다. 밀어내지도, 괜히 장난으로 넘기지도 않았다.
“시간 맞춰볼게요. … 가능하면 갈게요.”
“충분해요. 그 말이면.”
밤, 집.
샤워 후 거울 앞에서 윤서는 폰 케이스를 다시 쳐다봤다.
빛바랜 조각.
팬이던 마음이 사라져야 연애가 시작되는 건 아니겠지. 오히려 그 마음 위에 현실이 얹히는 거겠지.
창밖에서 바람 소리가 스쳤다. 오늘 하루, 스튜디오의 바람 기계보다 훨씬 부드럽게.
문자가 울렸다.
— 오늘, 실장님 덕분에 잘 마무리했어요.
— 리허설, 부담 없이 생각해요. 팬석에서 보든, 무대 뒤에서 보든.
— 어느 자리든, 실장님이 있으면 좋으니까.
윤서는 짧게 답했다.
— 내일도 반 밀리 조정이 필요하면 불러요.
잠시 후, 그쪽에서 웃음 이모티콘 하나와 함께 문장이 왔다.
— 네. 내일도, 모레도.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 순간, 아주 짧은 장면이 스쳐갔다.
무대 뒤 좁은 복도, 붉은 조명이 깜박이는 사이로 도현이 걸어 나온다. 관객의 함성 대신, 그녀 혼자 손뼉 치는 소리.
그리고 그의 입술이 먼지처럼 가벼운 말들을 떨어뜨린다. “제일 먼저 웃어줘요.”
윤서는 금세 눈을 떴다. 꿈인지 상상인지 분간조차 하기 싫었다. 한 번이면 충분했다. 오늘은 현실이 더 설레니까.
베개 옆에 폰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내일은 반 밀리 말고, 한 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