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82년 8월 무더운 여름 충청도 공주에서 나를 낳았다.
나는 엄마의 하나뿐인 피붙이이다.
나는 엄마에게 딸이고 친구이며 남편도 엄마도 되는
우리 엄마 최고의 재산이다.
모든 사람들이 소설 한 권은 쓸 만큼 사연 많지만 우리 엄마도 소설책 몇 권은 나올 만큼 기구하다.
우리 엄마 이름은 김순자
2024년 올해 71살 다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엄마는 예쁨을 독차지하기는커녕 막내라서 더 고단하게 자랐다.
가난하다 가난하다 해도 그런 가난한 집 없고 한글 겨우 읽고 쓸 줄 아는 국민학교 3학년 중퇴가 엄마의 최종 학력이 될 만큼 가난하게 자랐다.
엄마의 삶을 돌아보면 특히 다양한 죽음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다섯 남매 중 특히 각별했던 바로 위 언니는 돈 벌어 오겠다고 도시로 나갔다가 우울증을 앓고 고향집에 내려와 약을 먹고 엄마가 보는 앞에서 고통 속에 죽었다.
엄마의 부모님 두 분도 엄마가 갓 스무 살 되던 해 사고로 돌아가셨다.
배움도 짧고 사랑도 못 받고 가족들의 잇단 죽음으로 불안함 컸던 엄마는 빨리 안정을 찾고 싶어 결혼을 서둘러했다.
엄마는 첫 번째 결혼생활 중 아들 셋을 낳았는데 한 명은 낳고 며칠뒤 두 명은 돌도 지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 슬픔과 고통 속에 그 당시 아이를 낳아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으로 첫 번째 남편과 이혼을 했다.
그리고 나를 낳아준 아빠를 그 당시에 만나 엄마는 재혼했다. 재혼 후 나를 임신했고 병원도 잘 다니지 못했던 엄마는 산파할머니의 도움으로 나를 낳았다.
아기가 또 죽을까 불안한 가운데 내가 태어났고 산파할머니가 딸이라고 말해 주고서야 왠지 그동안 아들 셋을 떠나보내고 얻은 딸이라서 이 아이는 살겠다 싶은 기대를 했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건강히 자랐고 바로 연년생 동생 아들을 낳았는데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뒤 아빠는 트럭 사고로그 자리에서 죽는다.
엄마는 그렇게 사랑하는 언니와 부모님 세명의 아이들 남편까지 잃게 된다. 엄마에게 도대체 몇 번의 죽음이 지나가는 중인지 그간 겪어야 할 충격과 슬픔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나를 업고 동생을 안고 당장 먹고살아야 했던 엄마는 일자리를 구했으나 두 아이를 업고 안고는 일을 할 수 없었고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주변의 권유로 셋 다 굶어 죽을 수는 없지 않냐는 말에 눈물로 아들을 입양 보낸다.
내가 기억나는 시점은 6살 7살부터인데 그냥 처음부터나는 엄마랑 둘이 살았고 아빠라는 존재 개념은 없었다.
내가 7살 때 엄마는 나를 데리고 또 재혼을 했고 새로운가정을 꾸렸으나 내게 아빠의 부정적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준 새아빠는 알코올중독으로 내가 19살 때 돌아가셨다.
그렇게 엄마는 다양한 죽음들을 겪으며 부모에게 대물림된 가난하고 고단한 인생을 살았다.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뭘 알고 그랬는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날마다 다짐을 했다. 지독한 엄마 팔자가 나한테 대물림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