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나는 각자의 삶을 살기로 했다.
엄마는 새아빠의 빈자리를 또 다른 남자 친구로 채우려 했고 나는 그런 엄마가 싫어서 주유소에 달린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몇 달을 그곳에서 지내다가 나는 겨우 모은 돈으로 다가구 지하 단칸방을 구했고 밤에는 호프집 알바 낮에는 미용학원을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 한창 멋을 부리고 다닐 때 미용실에 가면 거기 선생님들이 나더러 미용을 하라고 많이 얘기했었다.
그 얘기 영향인지 나는 미용을 배워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학원을 다니며 자격증을 땄다.
흙집에서 벗어나 주유소 기숙사를 거쳐 처음으로 문도 있고 화장실도 주방도 집안에 달린 집에서 살게 되니 지하 방이든 뭐든 정말 좋았다.
그런데 한 가지 그 원룸 방 앞에 정화조가 있었는데 정화조 청소를 조금이라도 늦게 하면 온갖 똥오줌 오물이 내 집 화장실에 넘쳤다.
그때마다 또 왜 이리 서럽고 눈물이 많이 나던지 그래도 살아야 했기에 울며 청소하고 살았던 기억이 난다.
미용자격증을 따고 학원 원장님께 이쁨 받았던 나는 그 당시 스텝 한 달 월급이 20-30 할 때 나는 70만 원짜리 대형 샾에 취업을 하게 된다.
근데 월급 70만 원에 날마다 점심값 매달 월세 내고 생활비 하고 다달이 힘들다고 하는 엄마 용돈까지 감당이 안 됐다. 6개월 일하고 나는 그곳의 만류에도 그 일을 그만뒀다.
다들 같이 일하는 내 또래 직원들은 부모 밑에서 꿈을 꾸며 일을 할 때 나는 생활비에 허덕이는 고민을 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그만두는 게 정말 억울했다.
그 뒤 나는 취업 신문을 갖고 와서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 한 시간에 2만 원이라는 광고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일당 10만 원은 넘는다고 적혀 있었다.
뭐 중고등학교 때 놀만큼 놀았고 당장 먹고살아야 할 일들이 나를 힘들게 했기에 그 광고는 나를 겁 없이 그곳으로 가게 했다.
그곳은 밤에 일하는 노래방이었고 하는 일은 노래방 도우미였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무슨 용기였을까? 성숙해 보이려는 옷과 짙은 화장 불편한 힐을 장착하고 그곳에 갔고 그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일은 생각보다 적응을 잘했다.
그날 정말 나는 10만 원이 넘는 돈을 손에 쥐고 집에 왔다. 하루에 10만 원이 넘는 돈을 받게 되니 일은 힘들어도 조금만 하면 될 거 같았다.
그리고 몸을 파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정당화했다.
몇 개월만 일해서 바짝 돈을 모아 다시 미용실에 취업할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 나의 20대 초중반을 그곳에서 갇혀 방황하는 삶의 시작이 될 줄은 그날은 몰랐다.
그곳엔 내가 상상했던 티브이에서 본 무서운 언니들도 없었고 악덕 업주들 때문에 수천의 빛을 지어야 한다는 무서운 뉴스의 이야기들도 없었다.
다들 사연 없이 나온 언니들이 없었고 노래방 사장님들도 티브이에서 보던 그런 무서운 업주들도 나는 못 봤다.
다들 나름 그곳도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로 보였다. 그곳에서 나는 또래 친구들 그리고 언니들과 지내며 서로의 삶이 위로가 됐고 점점 일상이 됐다.
몇 달만 바짝 벌어야지 했던 처음 계획과 다르게 무질서하고 계획 없이 내일부터 내일부터 미루며 점점 일상이 망가지는 삶을 살아갔다.
낮과 밤이 다르고 매일 술과 담배 남자 유흥에 빠져 살고 아침이 되면 허무하고 그러던 중에 자꾸만 눈에 띄는 간판들이 보였다. 그것은 점을 치는 무당 집이었다.
어느 날 한번 호기심에 친구와 무당집에 갔다.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고 괜찮았다. 점을 봐주겠다던 무당은 몇 가지 질문과 어떤 의식을 하고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더니 내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한다.
얼마나 힘들었니? 가여운 딸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간 쌓였던 서러움이 모두 폭파했다. 처음부터 끝이 없는 터널 속에 갇혀 끝이 안 보이는 어둠 속을 걸어가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 엄마도 누구도 아닌 처음 보는 무당 아줌마의 따뜻한 손이, 나를 가엽다고 말해주며 흘리는 눈물이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그 뒤로 나는 무당집을 찾게 되었고 거의 미친 듯이 다녔다. 전국 방방 곳곳에 유명하고 용하다는 무당까지 다 찾아다녔다.
한 번은 강원도 어디였는데 만신이라고 하는 할머니 무당을 만난 적이 있다. 밤새 노래방에서 술 마시고 놀고 한숨도 못 자고 졸면서 운전하는 언니 차를 타고 겨우 강원도 만신 무당집에 도착했는데 정말 정말 앞도 잘 안 보이는 백발의 할머니였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할머니 무당은 자꾸만
뭐라고?
뭐라고? 고개를 흔들거리며 되물었다.
알고 보니 귀도 안 들려서 보청기를 끼고도 잘 못 알아듣는 할머니가 그렇게 용하다고 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간 거다.
처음 나의 손을 잡고 눈물을 보이며 가엽다고 해준 무당아줌마부터 보청기를 끼고도 잘 못 듣는 만신 할머니 무당까지 빠지지 않고 하는 말은 나보고 자기들과 같은 무당 팔자라는 것이다.
내가 무당 팔자라고?
그리고 무당들은 하나같이 우리 엄마를 흉봤다.
처음엔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위로가 나를 울렸고 그 말에 점점 중독이 되어 날마다 찾았고 엄마를 흉보는 거까지 내 마음이 위로가 되어 점점 무당집에 집착을 하게 됐다.
내 팔자가 세다고 보통 센 게 아니란다.
한 번은 어떤 무당아줌마가 너는 오늘 당장에 신내림을 받아도 바로 당장 작두도 탈만큼 세다고 했다. 무당이 되면 엄청 유명해져서 돈도 많이 벌 것이라고 유혹했다.
자꾸만 그 말들이 정말 사실이고 나는 내가 무당이 되어야 할 거 같은 마음이 자꾸만 가슴에 새겨져 무당 팔자라는 말이 내 것이 되어갔다.
무당팔자가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나 제대로 알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