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하루에 한 번,
엄마에게 전화가 올 시간이 다가오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늘은 또 무슨 화풀이를 하려나,
전화벨이 울리기도 전에 긴장부터 됐다.
어느 날은 참고 들어주다가
내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이었고,
어느 날은 못 참고 상처 주는 말을 내뱉곤 했다.
그리고는 이내 후회로 하루를 마쳤다.
그랬던 우리 모녀가
이제는 하루에 두 번씩 통화한다.
아침 출근길에 한 번,
저녁 퇴근길에 한 번.
한 번 통화하면 30분, 길면 40분.
엄마는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린다.
전화벨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딸, 우리 딸!”
활짝 웃는 목소리가 들린다.
전날 밤에도 한참을 수다 떨었는데,
하룻밤 자고 나면 또 할 이야기가 생긴다.
오늘 있었던 일, 아이들 이야기, 사위 이야기, 뉴스 이야기.
이제는 신앙 이야기까지 더해졌다.
엄마는 요즘 연예인 팬심으로도 분주하다.
한때 ‘미스터 트롯’ 장민호에 빠져 있더니
요즘은 배우 박형식, 박보검, 서강준 이야기를 매일 꺼낸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잘생기고 착하냐?
못 하는 게 없네, 세상에.”
그 말에 나는 웃으며 생각한다.
‘내가 엄마를 닮았구나.’
엄마의 새로운 소원은
“셋 중 한 명이라도 팬미팅을 가보는 거야.”
나는 이미 ‘미션’을 부여받았다.
언제 열릴지 모르는 팬미팅 티켓팅 성공을 대비해
순발력과 손가락 운동을 단련 중이다.
예전엔 엄마를 만나러 가는 게 힘들었다.
몸도 피곤하고,
가면 엄마의 신세 한탄을 들어야 했으니까.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갈 때면
나는 늘 중간에서 눈치를 봤다.
영재는 외할머니를 무서워했고,
나는 그 사이에서 괜히 아이에게 짜증을 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 영재도 제법 자랐고,
내가 하루이틀 집을 비워도
아빠랑 잘 지낸다.
그래서 나는 종종 원주로 내려간다.
한 달에 두어 번,
엄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러.
예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사진을 찍고,
지난날과 지금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올초 겨울에 엄마와 단둘이 남해로 여행을 갔다.
집에서 원주까지 두 시간, 원주에서 남해까지 여섯 시간.
긴 여정이었지만, 엄마는 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은정아, 바다 냄새가 벌써 나는 것 같다.” 하셨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커피랑 호두과자를 사서
차 안에서 까먹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엄마는 예전 이야기들을 꺼냈다.
젊은 시절의 억울함, 새아빠 얘기, 그리고 나.
나는 그때 처음으로,
엄마의 지난 인생을 ‘이야기’로 들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상처나 원망이 아니라 그냥 지나온 날의 추억처럼.
남해에 도착했을 때
햇살이 부서지는 바다 앞에서
엄마는 바람을 가르며 말했다.
“내가 진짜 여기까지 오다니, 세상에…”
그 말에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엄마의 얼굴엔 피로보다 환희가 있었다.
그 순간,
긴 세월의 모든 고생이 보상받는 듯했다.
그날 밤,
펜션의 하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딸, 이제는 네가 없으면 내가 심심해.”
나는 웃었다.
“엄마, 나도 그래. 이젠 엄마 없으면 재미없어.”
우린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이제는 통화의 끝마다
“사랑해, 엄마.”
“나도 사랑해, 딸.”
그 말이 어색하지 않다.
이젠 자연스럽다.
서로의 지난날을 용서하고,
서로를 안아주는 모녀가 되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원수 같던 엄마와 딸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게 기적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