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서시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는 1941년에 쓰여졌다. 당시 조국의 자유를 잃고 고통받던 시기에, 시인은 자신의 한계와 부끄러움을 성찰하며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이 시는 40대의 우리에게 인생의 어두운 순간에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되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아이들이 엄마와 떨어져 아빠와 오롯이 2박3일을 보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감사히 주말 동안 아이들을 끔찍이도 아끼는 도련님, 동서네와 함께여서 즐겁고, 행복하게 보냈다고 했다. 아이들과 처음으로 떨어진 나도 놓을 수 없던 긴장의 끈을 놓고, 몸둘 바를 모르며 시댁에 감사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행복한 주말을 보내고 온 다음 날
2020년 8월 17일 새벽 도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코로나로 확진되었고, 위험하니 가족들과 격리해.”라고,
주말 내내 도련님네와 함께하며 기쁨을 만끽했던 아이들과 남편,
아니길 바라지만 꼭 이런 날은 절대로 바람대로 되지 않는다.
도련님과 처음으로 접촉한 후 3일째였던 남편은 검사 후 이 지역 코로나 확진자 1번이 되었고,
다음날 5살 아이가 2번, 이틀 뒤 나는 3번이 되었다.
교육청, 군청, 보건의료원, 소속된 모든 기관에 불이 떨어졌다.
남편이 첫 번째 양성으로 의료기관으로 이송 후 다음으로 둘째가 양성이 나왔다.
전라남도 내에서도 어린이 환자가 많지 않았던 시기라 양성이라는 사실이 거짓이길 바라자며, 한 번 더 검사를 제안했다.
둘째의 재검을 위해 그 밤, 응급차를 타고 온 보건의료원은 그야 말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인구 3만도 안되는 이 지역에 처음으로 있는 일이 일어났다.
밤 10시쯤이었을까?
그 시간에 보건의료원 주차장에 불이 켜졌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던 어린이집 아이들은 그 밤에 와 모두 검사를 받은 것이다.
검사로 고통을 느꼈을 아이들의 우는 소리,
아이들을 달래는 어른들의 웅성이는 소리,
구급차 안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이렇게 우리 가족 3명이 코로나로 확진됨과 동시에 지역 내 수재민들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코로나 환자가 발생한 일로
이 지역에 방문한 자원봉사자, 국군장병 등 공적 수해복구 도움의 손길들이 다 돌아갔고, 면사무소, 체육관 등에서 임시거처로 집단생활을 하시던 어르신들은
차디찬 시멘트 바닥인 자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해 격리되어 있으면서 나는 마음이 힘들어서,
몸이 아파서,
하루도 편히 눕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숨 쉬지 못했다.
치료가 끝난 후 마을로 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해의 여파와 코로나로 면역이 급격하게 떨어져서인지 3주가 되어도 양성반응은 지속되었고, 기침이 멈추지 않아 날 보기만 해도 두려워하실 어르신들이 눈에 어른거려 마음이 아팠다.
우리 아이는 완치 후에 걱정스러워하는 다른 가족을 배려해 어린이집을 가지 못하고, 한 달을 집에 있었다.
그때는 코로나가 그렇게도 무서운 존재였다.
코로나 이후 나는 면역이 많이 떨어져 9월에도 반팔을 입지 못했고, 바람만 스쳐도 기침이 나왔다.
다행히도 입원해 있는 동안 발에 곪았던 염증은 서서히 없어지고 새살이 돋았다.
입원하지 않았다면 오래도 아팠을 것이다.
또 다른 어려움을 감당하는 동안 상처는 조용히 아물고 있었다.
이 지역을 떠나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도 했다.
좁은 지역사회이다 보니 소문도 무성하고, 전하는 말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수해와 코로나라는 중대한 문제로 나의 자존감,
정서적 안정감이 급격히 감소 되면서 불안한 마음이 더 컸기에 고민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가족이 1, 2, 3번 이어서 차라리 다행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였다면 그 비난과 난무하는 소문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도 같았다.
이 지역에서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우리라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지 않았다.
들리는 후문으로는 사람들이 아무리 캐고 캐도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 지역에 와서 알게 된 나름대로 소중했던 인연은 우리 가족 구성원을 접촉했던 정황과 자신들을 배려하지 못한다고 느꼈던 처우로 나를 비난했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촉구했다.
나름대로 대처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했음에도,
위급한 상황이 된다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도 되지만,
그때의 나는 몸도 마음도 너무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함께 걱정 해주고, 기도 해주며, 다시 일어나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정말 많은 이들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오가던 찰나 나는 결심했다.
“내가 왜 불행 중 불행이라고 생각되는 이 시점에 이곳을 떠나야 해?
나는 떠나더라도 행복한 마음으로 이곳을 떠날 거야!” 라며 굳게 다짐했다.
내 마음을 상하게 했던 사람들은 용서했고, 그들의 죄책감과 민망함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지금은 웃으며 안부를 전할 수 있는 관계이다.
그 이후 나는 5년째 이 지역에 살고 있다.
남편과 나는 2020년 8월,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이 일을
불행으로 로또를 맞았던 사건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은 그때를 기억하면서 마음을 아파하거나,
분해하거나,
애도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 일을 넉넉히,
잔잔한 미소로 넘길 수 있을 만큼의 기쁨과 감사가 내 삶과 주변에 가득 있다.
마음속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고,
삶의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
우리 가정을 든든하게 지지하는 부모님,
무엇보다 소중한, 어여쁘게 성장하고 있는 두 아들과 남편,
오가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좋은 이웃들이 있어서
마흔이 된 나는 이 지역을 사랑하고, 이 삶을 또 만족해하고,
행복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곳에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