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 남매 중 막내다. 태어나보니 위로 4살, 2살 터울의 언니와 오빠가 있었다. 자매끼리는 서로 친구처럼 지내기도 하고 함께 많은 걸 하며 잘 사이좋게 지낸다는데 나와 언니는 그러지 못했다. 4살 터울의 언니는 대체로 무서웠고, 가끔은 재수 없었다. 나보다 먼저 태어났다고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싫었다. 아버지 직장의 지방 발령으로 엄마와 아빠가 함께 지방에 잠시 가 계시는 동안 우리는 서울의 집에 셋이서 함께 살았다. 셋 다 직장인이었기에 각자의 생활을 하기 바쁜 와중에도 서로 싸우는 일은 쉬지 않았다.
대부분의 자매들이 그렇듯 체형이 다른 우리는 서로의 옷을 함께 입는 걸 싫어했다. 언니는 나보다 키도 2~3cm 더 컸고 조금 마른 체형인 나와 다르게 언니는 표준 체형이었다. 내가 언니 옷을 입으면 살짝 루즈핏인 반면, 언니가 내 옷을 입으면 살짝 타이트했다. 나는 주로 베이식한 스타일을 선호해 옷이 좀 비슷비슷한 것들이 여러 개였는데, 언니는 조금 독특한 스타일의 옷을 다양하게 구입하는 편이었다. 가끔 언니가 없을 때 언니 옷을 입어보면 그런 언니 취향의 옷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출근할 때 언니가 먼저 나가면 재빠르게 언니 옷을 입고 출근을 하는 날도 있었다. 나중에는 언니가 그러려니 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린 아마도 성향이 서로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성격이 정말 다르고 그러다 보니 생각하는 것도 달랐다. 언니는 영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아서 특정 종교의 책도 종종 읽곤 했는데, 그런 책을 읽는 것이 싫어서 언니 몰래 책을 버린 적도 있었다. 괜히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걸 보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항상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니고 어쩌다 죽이 맞아 놀러 가기도 하고 영화도 보고 맛난 것도 먹으러 다니기도 했지만 되돌아보면 그런 날은 사실 손에 꼽았다.
삼 남매인 우리 중 나는 가장 먼저 결혼을 했다. 서른에는 결혼을 해야지 하고 인생계획을 세웠었기에 29살 만나던 그와 자연스레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성을 만날 때 결혼을 전제로 만나왔기에 결혼을 엄청 특별한 무언가로 생각하지 않았고, 나와 잘 맞는 사람,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위해 그를 위해 서로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결심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2년 뒤 오빠가 장가를 가고 그리고 2년 뒤 첫 번째 조카가 태어남과 함께 언니가 결혼을 했다. 언니의 남편은 부부의 세계에서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를 외쳤던 배우 박해준이 생각나는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언니 직장 동료 소개로 만나게 되었다는데, 형부는 언니에게 헌신적이었고 서로에게 잘 맞는 듯 보였다. 무엇보다 언니가 드디어 짝을 만났다는 사실이 기뻤다.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형부와 언니가 함께 꾸민 신혼집은 깔끔하고 근사했다.
언니가 결혼하고 두 달 뒤, 큰 아버지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오랜 기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진행했지만 회복이 되지 않았다. 언니의 결혼식 이후 처음으로 장례식장에서 언니를 만났다. 가끔 통화를 하긴 했지만 언니와 형부에게 신혼 생활이 어떤지 물었고, 함께 식사를 했다. 언니는 평소보다 잘 먹지 못했고, 잠시 후 형부와 바람을 쐬러 나갔다. 장례식을 마치고 얼마 후 엄마로부터 언니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언니가 이대 목동병원에 입원했다는 것. 난소암이란다.
장례식장에서 배에 혹처럼 뭔가가 난 것 같아 병원에 가 볼 예정이라고 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소화도 잘 되지 않는다고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혹은 섬유종이겠거니 생각했고 큰아버지 일 때문에 소화가 잘 안 되는 건가 싶었는데, 모든 원인은 암 때문이었다. 암이라니. 이제 결혼한 지 2달 된 언니에게 그리고 형부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
곧바로 항암치료를 시작하고 여전히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요즘 워낙 의학기술이 발달했으니 언니가 곧 괜찮아지리라 막연히 생각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언니 집에 찾아갈 때면 언니는 항암치료 때문인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상태가 악화되면서 통원치료가 어려워 곧 다시 입원을 했다. 일산의 국립암센터에 입원을 했다. 잠시 일을 쉴 때라 가족들과 교대로 낮에 언니 간병을 맡았다. 밤에는 형부가 언니를 돌봤다. 낮에 언니가 있는 병실에 가면 먼저 내 몸을 소독하고 병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언니와의 접촉은 가급적 제한되었고 언니가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일 그리고 화장실 가는 일을 돕는 일 등을 보조했다. 그 외의 시간에는 tv를 틀어놓거나 책을 보거나 했지만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언니와 대화할 때면 언니는 형부의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 것을 매우 슬퍼했다. 나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았지만 언니에게 공감했다. 그게 어떤 심정인지 알기 때문에.
언니의 암을 알게 된 후로 1년여간의 투병이 이어졌다. 형부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언니를 치료하고자 했지만 언니의 상태는 쉬이 호전되지 않았다. 약을 쓰면 쓸수록 언니의 상태는 더욱 보기 안쓰러워졌다. 언니의 마지막 즈음 병원에서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가족들이 모두 모였을 때 마지막으로 본 언니는 내가 아는 언니가 아니었다. 그렇게 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날 언니는 세상을 떠났다. 1년 6개월 만이었다.
이기적인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언니가 형부를 만나고 짧은 시간이나마 결혼생활을 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알콩달콩 가정을 꾸리고 살고 싶어 했다. 그것을 이루었기에 그리고 언니를 치료하기 위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고군분투했던 형부가 있었기에 언니가 떠나는 마지막이 마냥 허무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물론 형부에게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마흔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기에 한 동안 언니의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했다. 내 휴대폰의 즐겨찾기 목록에는 레오, 엄마, 아빠, 언니, 오빠의 번호가 항상 등록되어 있었는데, 그 번호를 지우는 데까지는 3년의 시간이 걸렸다. 휴대폰에 언니가 있는 것만으로 언니가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듯 느껴졌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실수로 언니번호의 버튼이 눌린 적이 있다. 휴대폰 너머로 어떤 여자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못 걸었다고,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번호가 된 언니에 대한 미련을 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고 즐겨찾기 목록에서 지울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언니 오빠가 있는 삼 남매의 막내인데, 이제는 언니가 없다. 그래도 나는 가족이 어떻게 되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위로 언니, 오빠가 있는 삼남 내 중 막내라고 얘기한다. 지금은 없지만 사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