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길에 아침방송 제작진에 붙잡혀 인터뷰를 당한 적이 있다. 질문은 두 가지로, 첫 번째는 "나중에 아이를 낳을 거냐?" 두 번째는 "아이를 낳는다면 몇 명을 낳고 싶은가?"였다. 삼 남매 중 막내이자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대가족으로 살았던 터라 어릴 때부터 나도 당연히 세 명은 기본으로 낳아야지 라는 생각을 해 왔기에, "세 명은 낳고 싶어요"라고 답변을 했다. 제작진이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을까?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안 낳을 생각은 없어요?" "안 낳을 생각은 없어요." 이렇게 답을 했는데, 방송에는 "안 낳을 생각..." 이렇게 이 부분만 나간 걸 보고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일찍이 악마의 편집을 당한 경험이 있기에 그때부터 방송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게 되었는데, 대학 졸업 후 방송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생은 언제나 아이러니다.
초중고, 대학, 취업 그리고 결혼까지 삶의 굴곡 없이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흘러가는 인생이 나는 불만이었다. 위인들의 생애를 보면 다들 어떤 시련을 극복하는 장면이 나오기 마련인데, 위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뭔가 삶의 목표는 알 수는 없지만 거창한데, 나의 인생은 왜 이렇게 순탄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러다 위인이 되지 못하는 거 아니야? 라며.
결혼을 한 이후, 계획대로 흘러온 지금까지의 인생은 참 복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 결혼하면 아이가 생기는 것이 당연한 순리인 줄 알았건만. 1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자 이런저런 글을 찾아보고 우리가 난임부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난임이라니 생각해 복 적 없는 단어였다. 난임치료로 유명한 병원을 검색해 레오와 함께 검사를 받았다. 레오를 병원 앞에 데려가기까지 쉽지 않았다. 레오는 아이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생기면 낳고 그렇지 않으면 낳지 말자는 쪽이었지만 나는 예쁜 레오를 똑 닮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꿈이 계획이 있었다. (그냥 아이였으면 좋았겠는데, 레오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난임검사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검사 자체도 그 과정과 결과까지. 유명 난임병원이었지만 검사 결과를 이야기해 주는 의사는 경험이 많지 않았던 듯하다. 우리의 결과는 여자인 나보다 남자인 레오 쪽에서 좀 더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난임은 이유를 알 수 없어 애가 타는 경우도 많은데, 우리의 경우는 정액에서 정자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 조금 더 큰 원인이었다며, 의사는 원인을 알아낸 것이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유레카를 외치듯 검사 결과를 말했다. 그 말을 듣는 나와 레오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이후로 그 병원에는 다시는 가지 않았다.
난임 치료를 이어갈까도 생각했지만 레오 몰래 정자를 추출? 하기 위한 방법을 검색해 보니 레오가 겪어야 할 고통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도저히 그 과정을 헤쳐 나가 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도 나도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은 상태였고, 지쳐 있었다. 겉으로 티 내지 않는 그였기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그와 달리 나는 하루하루 히스테릭한 나날을 보냈다. 회사에서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입을 닫게 되었고.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들이었다. 나는 왜 그동안 허튼 생각을 하며 굴곡 없는 삶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걸까? 어리석었다.
그날 이후로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입양을 해 볼까? 정자 기증을 받아볼까? 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아이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건 레오의 미니미였다. 레오를 닮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뭔가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시간은 흘렀지만 아이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 사이 시간차를 두고 대학병원과 정자기증병원을 찾아가 봤다. 내가 원하면 레오는 따라 줬다. 그에게는 나에게 어떤 부채감이 있었던 걸까? 나도 레오에게 무언가를 얘기할 때 쉽지만은 않았기에 그런 마음을 그도 아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정자기증병원에서는 진료를 받고 기증받을 정자에 대한 후보도 받아보았다. 정자기증자의 대략적인 프로필을 받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정자기증도 선택지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게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아이가 없는 부부가 되었다. 아직도 나는 가슴에 진 응어리가 있다. 육아 프로그램이나 아이를 키우는 예능 프로그램은 보지 않게 되었다. 회사에서나 모임에서나 나를 아는 지인이거나 아니거나 간혹 아이가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가 생보다 자주 있었다. 그럴 때 아이가 없다고 하면 으레 아이를 낳지 않는 저출산의 원인이 되는 요즘 부부가 되었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듯이 아이가 없는 데에 한 가지 이유만 있을 리 만무한데 한 가지 이유로 치부당하는 것이 싫어 난임부부라고 답변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난임의 이유가 한쪽에만 있는 냥 특히 여자에게 있는 냥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 요즘에는 왜 아이가 없냐고 물으면 인터넷에서 본 데로 "그러게요"라고 답을 한다.
아이가 없는 삶을 그려본 적 없기에 나는 꽤나 긴 방황을 했다. 괜찮다가도 울적해지고 사랑스럽다가도 한없이 원망스럽고 다 싫어지고 그러다 뭔가에 몰입하면 무슨 일이 있었나 싶게 멀쩡해지고 오락가락하는 나 때문에 나도 정신이 없는데, 레오는 오죽했을까. 돌이켜 생각하면 미안하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된 일인 것뿐인데.
세 명의 아이를 낳겠다는 나의 바람, 나의 계획은 무산이 되었지만 나의 삶은 계속 흘러가고 있다. 나의 삶이 이렇게 계획되어 있는 거라면 이 삶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 내가 해야 할 몫일 것이다. 삶을 좀 더 자유롭게 살아보라는 선물로 생각하고 살아가야지. 그러다 가끔 또 눈물이 흐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