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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Jan 26. 2023

겨울에 잃어버린 것들(Ⅱ)


푸른 보자기에 싸여있는 작은 기억들


요즘은 자동차가 한 대 이상 있는 집들이 흔한 세상이 되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걸어 다니는 것이 일상의 삶이었고, 해외에 나갈 때도 대부분 일반여권이 아닌 관용여권을 소지했던 시절이었다. 내가 태어난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쳐 70년대까지도 도심지 사람들은 짐자전거를 타거나 걸어 다니며 일보는 것이 생활화돼 있었다.


1968년 낯선 서울로 중교진학을 한 뒤, 그 해 11월말 전차(電車)가 사라지고 아침이면 등굣길 버스를 놓칠까봐 시내 정류장까지 늘 잰걸음으로 서두르곤 했다. 출근하는 시간대 만원버스에 가까스로 올라서면 힘껏 밀어 구겨 넣고는 오라이를 외치던 여차장(女車掌)과 함께했던 60~70년대 콩나물시루 버스모습이 떠올려진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했던 중1시절, 기약 없는 다음버스를 기다리다 혹여 지각이나 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긴장한 채 만원(滿員)버스에 올라야했던 그 시절 모습들이 선명하다. 하지만 전광석화처럼 변해가는 세상을 살면서 이 겨울이 십수년 반복되다보면 그 또렷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어린 시절 기억을 몇 줄 남겨둔다.



가난했지만 정직하고 순박했던 196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상대를 속이거나 불합리한 이윤을 바라지 않았다. 생계유지조차 힘들어 고달팠지만 그들은 순수함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시골 아닌 도심지 사람들도 이웃 간 좋은 일은 격려해주고, 어려운 사연에는 위로하며 일손이 부족하면 서로 도우며 끈끈한 정을 나누던 시절이었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후 태어난 베이비부머(55년~63년) 세대들의 어린 시절은 대부분이 가난했던 탓에 하루식량 조차 녹녹치 않았기에 학교에서 나눠주던 옥수수 빵 하나에도 많은 추억이 담겨있다. 전쟁폐허와 보릿고개를 겪었던 60년대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했다. 설과 추석 선물은 대부분 굶주린 배를 채워줄 조그만 먹거리였다.



도회지(都會地)에서는 간혹 미군 군수품으로 나오는 시레이션과 같은 전투식량을 간식거리로 구할 수 있었고, 도심시내 양키시장에서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과자나 초콜릿, 사탕들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그림의 떡일 뿐, 그나마 왕사탕 한 개가 가난했던 60년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유일한 군것질거리였다.


노상(路上)에서 팔던 왕사탕은 공장이 아닌 어둑한 공간에 백열등을 켜놓은 낡고 허름한 가게에서 만들어졌다. 가게주인은 짜장면 밀가루반죽을 하듯 벽에 박힌 대못에 엿가래를 걸어놓고 잡아당기며 적당한 크기로 잘라내 모래같이 투박한 설탕덩이로 버무려 왕사탕을 만들었는데, 눈만큼 크고 동그랗다 하여 눈깔사탕이라고도 했다.


신세대 왕사탕

두툼하고 시커먼 주인장의 두 손으로 동그랗게 빗어낸 왕사탕은 지금 같으면 위생상 불량식품이었지만, 그 시절은 그나마도 사먹을 돈이 없어 어깨너머로 군침을 흘려야만 했던 빈곤한 시절이었다. 시골에서는 한번 입속에 넣으면 10리(里)를 갈 동안에 아껴먹는다 하여 왕사탕을 십리사탕이라 부르기도 했다.


사탕하나를 얻게 되면 커다란 사탕을 입에 넣고 이쪽저쪽 번갈아 옮겨가며 볼 딱지가 툭 불거진 채 빨아먹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초교입학 전쯤(1961년) 노상자판에서 5개 10환(1원)에 팔았던 것 같다. 군것질거리가 귀하던 시절이기에 사탕은 아이들 동경의 대상이었고, 볼이 미어져라 입안을 가득채운 눈깔사탕은 행복 그 자체였다.  


1960년 초 10환(圜) 동전

그런데 그 눈깔사탕과 함께 팔았던 ABC과자는 당시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1961년 크라운산도 과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시절 지방에서는 산도 과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당시 시골에서는 부모님이 읍내 5일장에 가시는 날이면 아이들은 온종일 그 왕사탕을 사오 실 아버지를 기다렸다.


저녁나절 아버지가 돌아오는 시각이 되면 동네어귀 성황당 길목을 향해 아이들의 눈길이 쏠려있고 부모님이 장에 가지 않은 아이는 웬 지 풀이 죽어 있었다. 서산에 해 넘어갈 무렵 멀리 동구 밖에 아버지 모습이 나타날 때면 논두렁 사이 길을 단숨에 달려가 왕사탕을 찾아내느라 장마당 자루를 풀어헤쳤다.



사탕이라면 오다마(おおだま;왕사탕)와 미루꾸(ミルク;밀크카라멜) 밖에 몰랐던 먹을 것이 귀했던 1960년대, 그 당시 군것질거리를 말해줘도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 시절에는 센베이(せんべい;전병)와 오꼬시(おこし;밥풀과자)도 명절 때 먹어볼 수 있었던 과자였다.


오꼬시

그 시절에는 마을동네 어쩌다 나타나는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날 때면 부엌에 걸려있던 제일 반짝이는 냄비를 몰래 들고 나와 못으로 큰 구멍을 낸 뒤 엿과 바꿔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낡은 냄비와 헌 신발도 엿과 바꿔준다는 엿장수의 외침에 별 생각 없이 냄비에 구멍을 뚫고는 낡은 냄비로 둔갑시켜 엿과 바꿔먹었다.



엿을 들고 신나게 뛰쳐나가 코흘리개들과 나눠먹고 모자라면 반씩 나눠먹기도 하고 한입씩 돌려가며 빨아먹기도 했으니 이것이 우정이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비할 수 없는 하늘의 축복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엄마에게 들통이 나 혼난 뒤 겁에 질려 밤새 오줌을 지려 머리에 키를 뒤집어쓰고 이웃집을 돌며 오줌싸개 신고하며 다니기도 했다.


        

그밖에 양지바른 길거리나 골목에 자리를 펼쳐놓고 팔던 뽑기(찍어먹기)와 달고나는 추억을 떠올리는 최고의 군것질거리였다. 과자에 새겨진 무늬를 바늘로 긁어서 뽑아내면 1개를 더 주기 때문이었다. 80년대에 들어서 사라졌지만 최근에는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으로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관광지에서도 간혹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크라운, 해태, 롯데 제과가 등장하고 1963년 삼양라면과 1964년 삼립크림빵이 국내최초로 선보이며 10원에 판매됨으로서 대한민국 서민들에게는 최고의 먹거리혁명이 되었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달콤하고 하얀 크림이 담긴 빵과 구수한 라면은 먹을거리가 부족한 60년대 어린 시절의 값비싼 먹거리였다.



이후 잘 살아보자는 [새마을 운동]과 활발한 산업화 추진으로 70년대는 사람들의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다. 1975년 1월에는 어린이날이 법정공휴일로 지정되며 어린이날에 대한 인식이 확산돼, 어린이날 선물을 챙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당시 인기 있는 선물은 여러 종류의 과자가 들어있는 종합선물세트로 10여년 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먹거리 외 60년대 학교 앞에 아이들의 볼거리는 요지경(瑤池鏡)이라 불렀던 추억의 뷰마스터(View Master)가 있었다. 지금 60대 이상 나이라면 초등학생 시절 당시 국민학교라 불리던 학교 앞에서 이 요지경을 보면서 환상에 빠져들기도 했는데,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요지경을 경험했던 추억이 있을게다.


요지경(View Master)

아련한 기억으로는 1962년 초교 1학년쯤 일듯한데... 커다란 가방하나 메고 학교 앞에 나타나던 아저씨는 학교정문 앞에 좌판을 벌인 뒤 5환(圜)쯤 받고 요지경을 보여준 듯한데, 당시 입담 좋은 아저씨는 파노리마 필름 속 동화이야기를 마치 무성(無聲) 영화 변사(辯士)처럼 막힘없이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1962년 6월 제3차 화폐개혁으로 기존의 환(圜)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이후에는 1원(10환)을 주고 요지경을 본 듯 여겨진다. 1992년 디즈니랜드 숍에서 옛 추억을 떠올리는 귀여운 미키마우스 뷰마스터를 구입하기도 했는데, 옛날 학교 앞 요지경은 가운데 나무막대를 연결해 붕대 같은 것으로 칭칭 감아놓았던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 2~3학년 때까지 방과 후 학교정문 옆 만화가게를 자주 찾았다. 어린마음에 그 공간은 내게 안온(安穩)한 곳이었다. 만화에 빠져 키득거리다 고개를 들면 여기저기 비슷한 즐거움에 웃고 있는 아이들도 볼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마음을 가득 담고 행복해했던 나만의 공간이 만화방이었다.



초교시절 한때는 만화가게를 운영하는 집 아이가 제일 부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1964년쯤에는 일정량의 만화를 보면 흑백TV를 볼 수 있는 쿠폰을 발급해 주기도 했다. 김일 박치기 레슬링을 보려고 쿠폰을 받기위해 만화를 보기도 했지만, 간혹 마음껏 만화를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어릴 적에는 신나는 일이었다.



지금껏 기억에 남아있는 만화는 독특한 그림체로 독일 나치와의 전쟁물을 그렸던 이근철 만화와 동물전쟁(최경; 1962) 그리고 의사 까불이(김경언; 1963) 등 제목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이후 중학교에 진학한 뒤로 만화는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1973년 일간스포츠에 연재됐던 고우영의 수호지(水滸誌)는 재밌게 보기도 했다.



밤새 하얀 눈이 많이 내렸다. 올겨울 들어 소담스레 쌓인 순백의 풍경에 문득 옛 추억을 떠올려본다. 어릴 적 맑은 눈동자로 바라본 솜사탕 같던 함박눈과 낱 이파리를 촘촘히 모아놓은 푸른 보자기에 하얀 눈을 받아들고 있던 한 그루 소나무... 세월은 가고  머리에는 흰 눈이 내려앉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기억들만은 아직도 겨울나무 가지위에 그 푸르름을 남겨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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