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먹성이 좋았다.
태어날 때 신생아 황달로 고생을 했지만 딱히 아프지 않고 무럭무럭 잘 자랐다.
거의 예방 접종 때만 병원에 갔다.
하지만 사는 아파트단지가 너무 커서 아기를 앉고 대로변에 있는 병원까지 가기는 무리였다.
유모차 때우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직 목을 못 가눴고 그 당시는 눕는 유모차는 없었다.
그래서 접종하는 날은 언니가 차로 데려다 주어 수월히 해결할 수 있었지만 장을 보자면 힘들었다.
요즘 같은 인터넷 장보기가 있었으면 훨씬 편했을 것이다.
길에 빙판이 깔린 날은 아들과 같이 업어질까 봐 아들이 잠든 동안 얼른 다녀오느라 가슴이 두근거렸던 적도 있고 날이 너무 추워 아들을 등에 업고 이불을 씌웠더니 숨이 갑갑한지 버둥거려 힘들어 혼난 적도 있었다.
특히 힘든 적은 내가 아팠던 날이다. 열이 오르고 기운이 없는데 아들은 영락없이 시간마다 울었다.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나 아들을 챙기고 아들과 같이 기절하듯 누웠다. 내가 처량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힘도 없었다.
어쩌다 친정엄마가 오시면 내가 살 것 같았다.
잠시나마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자유롭게 장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 가게 저가게 구경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아들을 기를 때는 밥도 편히 못 먹고 얼른 한술 먹고 우는 아들 달래고 밥 할 때도 봐주는 사람이 없으니 등에 업고 밥을 했다.
그래도 명절이면 갈비찜을 해가지고 시댁에 가야 했다. 큰며느리였으니 말이다.
한 번은 읽고 싶은 소설책이 있었는데 아들을 데리고 읽을 수가 없어 등에 업고 점심도 굶고 다 읽은 적이 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그 시절은 친구와 전화도 못했다. 무선 전화기가 없었으니 전화기가 있는 한 곳에 머물 수 없어서 그랬다.
어떤 이는 "과부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버젓이 남편이 있었다. 주말만 남편이 아들을 좀 봤지 평일은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같으면 이혼이란 말이 나왔을 것이다.
아들은 10달 되던 어느 날 아침 걷기 시작을 했다.
그러더니 달리기도 하였다. 물론 여러 번 넘어져서 이마에 혹이 생겼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습을 해 저녁쯤 되니 잘 달렸다.
기특했다!
걸음마를 하며 말도 하기 시작을 했고 15개월엔 대변을 가렸다. 만 두 살쯤 되어 소변도 가리고 이불에 실수한 적이 없었다.
여러 모로 신통했지만 그래도 혼자 하는 육아는 지금 생각해도 힘들다! 숨이 막히는 느낌이다.
모든 엄마들은 장하고 위대하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그리고 아들을 키우며 처음으로 배운 것은 다른 집 모든 아이가 귀하다는 사실이었다.
그전엔 한 아이가 이 정도로 귀하다는 것을 피부로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