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남
한국전이 끝난 지 10년쯤 되는 겨울 어느날, 지금은 서울로 편입된 경기도 남부의 한 동네에 남루한 옷을 걸친 깡마른 사내가 담이 높은 기와집 주변을 서성거렸다. 누구를 기다리는 듯, 가끔은 초조해 보였고 몹시 추운 듯 움츠린 채 주머니 손을 넣고 닿는 살갗을 찾아 비비고 있었다. 굳게 닫힌 기와집의 문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좀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사내 앞에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의 신사가 나타났다. 신사의 눈매는 차갑고 표정이 없었다. “또 자넨가? 우리 덕이는 자네와 맞는 사람이 아니니 우리집 앞에 이렇게 찾아오는 일 없었으면 좋겠네. 집 앞이 어지러우니 당장 다른 곳으로 가게 ” 사내는 말을 꺼내지도 못한 체 커다란 기와집으로 들어가는 신사를 보고 고개를 떨구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돌아서기 전 “ 그래도 전 덕이 씨를 사랑 합니다. ” 라고 담장 안으로 그게 한마디 외치고 또 한마디 외치려는 순간 물벼락이 날아 왔다. 날이 추운지라 물은 날카로운 칼을 맞는 듯 차갑고 아팠다. 그래도 다시 오겠다는 다짐으로 그 집 대문에 몸을 한번 비비고 쓸쓸히 발길을 옮겼다. 덕이는 대문 밖 소란을, 귀를 쫑긋하고 듣고 있었다. 집안 높은 곳을 찾아 그 사내가 어디로 가는지 사내의 뒷 모습을 측은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군에서 운전병을 했던 사내는 그 시절 쉬운 기술이 아닌 트럭을 운전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일자리는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취직자리를 찾고 그 집 앞을 서성이느라 배를 채울 수 없었다. 사실 수중에는 밥 한 끼 해결할 돈 도 없는 상황이었다. 저녁이 되면서 날은 더 추워지고 쉴 곳을 찾아야 했지만 그대로 집으로 가긴 싫었다. 그래도 발길은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는데, 공부를 시켜주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다. 지난 일이 떠올랐다. 혼자서 학교를 찾아가 또래 아이들이 공부하는 것을 학교 교실 담 밖에서 보곤 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선생님 한 분이 어린 사내를 교실로 들였다. 연필과 종이를 주고 한글을 쓸 수 있는지 써보라고 했고, 4학년 교실에서 공부하면 되겠다고 말씀하시고, 학교에 나오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기분이 좋아진 채로 집에 이 사실을 알렸으나 사내의 아버지는 어린 사내에게 ”난리 통에 무슨 공부야!! 일이나 해! “ 라고, 부라린 눈으로 어린 사내를 쏘아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겁먹은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사내의 아버지는 목수 였다. 동네 궂은 일도 많이 하고 일감도 많은 편이었으나 무슨 이유인지 도통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담고 거닐던 사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고 이내 언 뺨을 타고 내리고 있었다. 추운 밤은 길었다. 몰래 들어간 집에는 누나 둘과 형이 있었다. 모두 잠든 터라 허기를 달랠 것을 찾아 혼자 부엌을 뒤졌다. 한쪽으로 치워져 있던 식은 밥을 게 눈 감추듯 먹고, 이력서라도 써보려고 든 연필을 손에 쥔 체 잠이 들었다.
사내가 덕이를 처음 본 것은 동네 시장에서였다. 덕이는 귀 티가 났고, 사내가 보기엔 너무나 예쁜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사내가 서성이던 기와집 앞에서 만났던 중년의 신사는 덕이의 오빠였다. 사실 모두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덕이 오빠가 공부를 좀 할 수 있었고, 전쟁 때 미군 부대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터라 다른 집보다는 살림살이가 좋았던 것이다. 덕이는 엄격한 가정의 통제를 받으며 조금은 부유하고 안전한 삶을 살고 있었다. 사내는 마르고 남루한 옷차림이었지만 꽤 잘생긴 얼굴이었고 눈빛은 맑고 초롱 했다. 우연히 마주친 사내와 덕이는 눈이 마주쳤고,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그 때부터였다. 사내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 싶었고,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어디에 살며, 이름은 무엇인지 알아냈던 것이다. 짧은 마주침이지만 따뜻해 보이고, 교양 있어 보이고, 너무나 예뻤던 그녀의 얼굴이 매일 가슴을 뛰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집념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매일 그 집 앞을 서성거렸고, 한 번이라도 더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 애를 썼다. 덕이는 그 맑은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고, 매일 자기를 찾으며 담장 밖을 소란스럽게 하는 그 사내가 궁금해졌다.
사내의 연가 1
배고픈 이성으로 그대를 보지 않았어요.
가난하지만 나를 한번 봐 줄 수 없나요?
난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없나요?
한 번만이라도 물어봐 주세요.
내가 누군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단 한 번의 눈길에
나는 당신에게 모든 영혼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걸 알아요
내 배고픈 운명도, 당신이 내 안에 들어온 것도
모두 내 것입니다.
세상을 원망치 않겠어요
나는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니까요
부디 나를 한 번 봐주세요
이미 그대는 이 추운 겨울을 녹일
나의 태양이 됐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