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
전쟁이 끝난 거리는 황폐했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 또한 고된 일이었다. 시절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쉬이 가라앉히지 못했다. 3·15 부정 선거는 1960년 4월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유발했고, 4·19 혁명이라 불리는 대규모 시위는 부정 선거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려던 대통령을 하야시켰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사회는 1961년 5월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는 격동의 시대로 접어들었었다. 사람들은 민둥산이 되어버린 산에 나무 심기, 도로 넓히기, 지붕 개량 등등 여러 가지 사업에 동원되기도 하고, 지속되는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사내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무관심했다. 하루라도 빨리 배고픈 시절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사내는 군사정변 이후 전역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사내는 덕이를 처음 본 겨울이 가장 추웠고 또 가장 따뜻했다. 그 겨울이 수없이 덕이의 집 앞을 서성거리는 일로 지나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를 벚꽃이 피고, 쓸쓸한 거리에도 개나리와 진달래는 어김없이 피고 있었다. 운전을 할 줄 아니 운전수를 모집하는 회사들을 계속해서 기웃거리던 어느 날 양복을 잘 차려입은 신사를 경기도 외각의 버스회사 근처에서 우연히 만났다. 김 상사였다. 김 상사는 사내의 군 복무 시절 함께 근무했던 부대의 상관이었다. 이유 없이 괴롭힘 당하고 구타에 시달리는 사내를 대대장 차를 운전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가까이에서 형님 같은 애정을 보여줬던 사람이다. 김 상사는 사내가 측은했고, 괜스레 정이 갔던 모양이었다. 김 상사와 사내는 서로를 단번에 알아봤다. ”김 상사님!! 양 병장!! “ 서로 호칭을 부르며 두 손을 맞잡았다. 그렇다 사내의 성은 양 씨였고 이름은 준기였다. 근처 다방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준기의 딱한 사정을 김 상사는 새겨듣고 있었다. 김 상사는 준기가 전역한 후 어수선한 시절에 군에 있기가 싫어져 전역을 하고, 운수업을 시작하여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김 상사는 준기를 곁에 두고 싶었으나, 사업 초기이고 대형 면허가 필요했던 터라 준기를 당장 채용할 수 없었다.
덕이의 집안은 왜정 때 덕이의 아버지가 일본군에 협조하지 않아 고초를 겪었고, 해방될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덕이의 엄마는 여린 체구였지만,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딸들에게도 집에서 글을 가르쳤고, 어떻게든 남편이 없는 집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전쟁통에는 철수하던 인민군이 집을 야영지로 쓸 정도로 마당이 넓고 큰 집을 4남매를 키우며 지키고 있던 것이다. 인민군이 마당을 점령했을 때, 덕이의 언니는 나이가 차서 해를 당할까 다른 집에 보내고,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아들이 발각될까 아이들을 단속시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굶주린 인민군들에게 밥을 지어 주었다. 마치 자기 자식을 대하듯 배고픈 어린 인민군들을 먹이고 재웠다. 그 시간은 길지 않게 끝나고 지프차를 타고 미군과 함께 아들이 집에 왔을 때는 아무 일 없었던 듯 평온한 상태였다. 덕이 어머니의 지혜로 어려운 시절을 헤쳐 왔던 것이다. 당시는 문맹도 많아서, 덕이의 오빠는 동네에서 통장 일을 봤다. 봄이 될 무렵 덕이의 오빠는 집 앞을 어지럽히는 준기가 보기 싫었다. 덕이를 하루라도 빨리 좋은 혼처를 찾아 시집보내기로 결심했다. 덕이는 그 사내가 궁금했다. 대문 앞 물벼락 소동이 있고 며칠 후 덕이는 시장터에서 사내를 만났었다. 그리고, 물벼락 등 모질게 군 오빠와 식구들의 무례에 대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부탁도 했었다. 그때 사내는 ”내 이름은 준기입니다. “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덕이 씨는 평생 사랑하고 지킬 수 있어요 “라고 말하며 자기를 봐달라고 읍소 했다. 덕이는 마음이 쓰였다. 이 사람 가엽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에 싸인채 시간을 보냈고, 오빠 몰래 몇 번을 더 만났다. 덕이의 오빠는 이 사실을 아는 듯했다. 봄이 한창이던 어느 날 덕이 오빠는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집에 들어와 어머니와 식구들이 있는 앞에서 덕이의 혼처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는 이렇다. 성은 백 씨이고 K 대학을 나왔고, 좋은 직장에 다니며, 집안도 좋아서 덕이가 호강할 거라는 것이다. 이미 선볼 날짜를 잡아 왔고,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어머니는 잠시 덕이의 눈치를 살피고 ”잘됐다. 한 번 만나봐라 “라고 말씀하셨고, 덕이 오빠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마치는 것으로 덕이의 선보는 것은 결정됐다.
선을 보는 자리에서 백군은 덕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덕이도 백군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그런데, 덕이의 머릿속을 집 앞에서 늘 자기를 기다리고 소란을 피우던 준기가 헤집어 놓고 있었다. 백 군과의 만남이 몇 번 더 이어지는 동안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탔다. 덕이는 백 군과의 결혼이 결정되던 날 준기의 쓸쓸한 모습이 자꾸 떠올라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그저 혼자 자기가 좋아서 그런 거야! 나랑 상관없어. ”라고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덕이의 결혼이 결정될 무렵 준기는 김 상사의 도움으로 B 맥주 회사에 운전수로 취직했다. 너무나 기뻤다. 준기는 덕이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더 열심히 구애를 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덕이 집의 문단속은 더욱 심해졌고 덕이도 만날 수가 없었다. 덕이네 집이 통장 집이라 사람들의 입을 타고 덕이의 결혼 소식은 빠르게 전달됐고, 준기의 귀에도 닿았다. 준기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장터에서 술에 취해 아무 사람에게나 시비를 걸고 이리저리 헤매다 집에 돌아온 준기의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멍과 상처들이 있었고, 그 상처들보다 더 아픈 마음으로 쓰러져 누운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덕이 혼처에 대한 무성한 소문도 준기를 괴롭혔다. 또 공부를 시켜주지 않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무심한 봄 날은 한 없이 맑고 이름 없는 꽃들조차도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덕이의 연가 1
나를 사랑하지 말아요.
나는 그대를 몰라요.
내 마음엔 연민뿐이죠
그대의 맑고 지친 눈은
나를 힘들게 해요
봄날이 여러 번 와도
나는 당신의 봄이 될 수 없어요
저녁이 되면 쉴 곳을 찾으세요
아침을 깨울 당신만의 고운 손을
찾아야만 해요
사랑은 무엇인가요?
그대를 처음 봤을 때 두근거렸던
그 마음도 사랑인가요?
어떤 사랑이
나의 미지를 채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