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여름은 어지러이 망가진 세상을 삶아내듯 뜨거웠다. 준기의 새 직장 생활은 원만히 진행되고 있었고, 그럴수록 다가갈 수 없는 덕이가 더욱 그리웠다. 여름이 깊어갈 무렵 동네는 장마로 한바탕 물난리를 겪었다. 수해를 입은 주민들이 덕이네 집 마당에 임시거처를 마련했다. 통장 집이고 또 집도 넓은 터라 덕의 오빠는 딱한 주민들을 잠시라도 거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준기에게는 장마가 준 선물 같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준기도 집이 물에 잠겼다고 덕이의 집 마당에 숨어들었다. 마당에는 있었지만 좀처럼 덕이의 얼굴은 보기가 힘들었다. 마당 이곳저곳에는 텐트가 쳐지고, 사람들은 물에 잠긴 자신들의 집을 오가며 분주히 다니고 있던 터라, 굳게 닫혀있던 대문은 거의 매일 잠자는 시간 때 빼고는 열려 있었다. 덕이의 엄마는 사람들에게 나눠줄 끼니를 만들어 나르고 이리저리 분주했으나 아이들을 챙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덕이는 엄마를 돕고 싶었으나 혼사를 앞둔 딸을 어수선한 곳에서 일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생각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갑자기 마당이 더 시끄러워졌다. 마을 사람 하나가 물에 잠긴 집에서 뭐라도 건지려고 갔다가 물에 쓸려 오던 물건에 부딪혀 많이 다쳤던 것이다. 물난리 통에 자동차 운행이 어려운 상황이라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준기는 이 광경을 보고,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 앞에 나섰다. 준기는 군에서 배운 야전 응급처치술로 상처를 소독하고, 환자를 안정시켰다. 사람들이 양목수 집안 막내아들이라고 얘기하면서 그의 행동을 칭찬했다. 덕이도 소란스러웠던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덕이의 엄마도 수고했다고 칭찬하고 싶었으나 매일 집 앞을 서성이던 청년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짧은 말로 격려하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준기에게 물었다. 결혼은 했냐, 사귀는 사람은 있냐 등등. 준기는 큰 소리로 “저는 이미 제 배필이 있습니다.”라고.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에게 “곧 국수 먹여 드릴게요.”라고 말하고 빙긋이 웃었다. 덕이도 덕이 엄마도 궁금했다. ‘잘된 일이다. 결혼할 처자가 생겼다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굴까?라는 궁금증을 털지 못했다. 준기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살아갈 능력도 됨됨이도 모두 갖췄다고 누군가에게 항의하듯 의협심을 불태웠다.
장마가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 무렵, 덕이는 백군과 좀 더 자주 보게 됐다. 백군은 대기업의 기획실에 근무하며, 회사의 배려로 미국 유학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덕이에게 결혼해서 같이 가자고 들뜬 마음으로 덕이에게 얘기했다. 덕이는 모든 것이 갑작스럽고, 때로는 당황스럽기도 했다. 덕이의 집에서는 정말 잘됐다고 좋은 남자 만났으니, 결혼해서 내조 잘하면서 살면 그게 행복이라고, 덕담을 늘어놓았다. 덕이는 꿈이 있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집도 원망스러웠고, 배우지 못해 늘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하는 주변의 사람들과 어린 친구들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이런 친구들에게 글도 가르치고 희망을 심어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결혼이라니 마음이 답답했다. 그리고 가끔 장마 때 자신도 힘든데 주변을 돕는 준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추석이 되면서 집안사람들이 모이자, 덕이의 혼담이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당사자의 일임에도 덕이는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 백군의 집안은 결혼을 서둘렀다. 미국 유학길에 혼자 보내기보다는 결혼시켜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양 집안 사정은 달랐지만, 이른 시간 안에 혼사를 치르기를 원하는 것은 같았다. 날이 잡혔다. 10월 20일 종로에 있는 호텔에서 신식으로 하기로 했다. 백군은 덕이에게 뭐가 제일 갖고 싶냐고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물었다. 덕이는 크게 원하는 게 없다고 말했다. 만날 때마다 백군은 두 사람의 미래 청사진을 하나씩 꺼냈다. 덕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 허전한 마음이 덕이를 괴롭혔다. 이 사람과 나는 사랑일까? 나는 무얼 하지? 되돌아오는 것은 답이 아니라 계속되는 질문만 돌아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9월 말이 되자 제법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동네 곳곳은 수해 입던 상처를 때우고 있었고, 미뤘던 신작로 공사도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덕이의 집은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의 전입 신고와 또 동네를 떠나는 사람들의 퇴거 신고를 받고 처리하느라 여름보다 더 북새통이었다. 동네를 떠나는 사람이 덕이 오빠에게 물었다. “통장님!! 덕이가 양 씨 댁 막내랑 결혼합니까?”라고,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덕이가 결혼한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 짝이 양 씨라고 소문이 쫙 퍼졌다는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고 덕이오빠는 동네 사람에게 쏘아붙였다. 덕이 오빠는 혼사를 앞두고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고 헛소문이라고 덕이 오빠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상한 소문 더 내지 말라고 부탁했다.
사실 소문은 준기가 입만 열면 덕이는 내 색시가 될 것이고, 꼭 그렇게 만들겠다고 떠벌리고 다닌 것에서 비롯됐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 입을 타고 소문은 결혼 당사자까지 바꿔버렸다. 동네 사람들한테는 통장 집 여동생이 가난한 양 씨 집 막내랑 결혼한다는 소문이 더 재밌었던 것이다. 좋은 배경의 혼처를 만나 그렇게 시집 잘 갔다.라는 말보다는 말이다. 소문은 심상치 않은 상황으로 전개됐다. 백군 집에서 겉으로는 말 못 하고 있던 불만들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과 여유 있는 집에서 왜 공부를 안 시켰을까? 그리고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 동네에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났을까? 하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소문은 덕이가 이미 준기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까지 돌아다녔다.
가장 불편한 사람은 덕이었다. 지금까지 덕이의 의지대로 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소문마저도 실망스럽기에 그지없었다. 덕이는 준기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덕이의 오빠와 엄마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덕이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덕이는 준기를 만났다. 도대체 이 상황이 뭐냐고 잔뜩 벼르고 물어보려는 순간, 준기가 따뜻한 미소로 물었다. “밥은 먹었어요?” 순간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의 시간이 멈췄다.
백군은 가족들의 불평을 덮느라 정신이 없었다. 덕이는 정숙한 여인이고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글을 깨쳤고 교양도 훌륭한 아름다운 사람임을 피력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던 차에 덕이와 준기가 만났다는 얘기가 백군에게 들렸다. 백군은 황급히 덕이를 만나러 덕이의 집에 찾아갔다. 저녁 무렵, 덕이의 집 앞에서 덕이와 준기가 함께 오는 것을 백군은 아픈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노을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는 그렇게 끝을 모르고 길게만 늘어져 가고 있었다.
-노을의 연가-
마지막이라 생각했어요.
이 시간이 지나면 우린 다시 볼 수 없어요.
늘어진 그림자만큼
사랑도 깊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붉은 입술을 그대에게 드리워도
그대의 색깔은 온통 바래진 잿빛이군요.
시간이 없어요
이제 서로를 봐야 할 시간입니다.
그림자에 기대지 말아요.
밤을 허락하고,
새로운 태양을 맞아야 합니다.
그렇게 숨을 쉬어야 합니다.
사랑이 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