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
그렇게 내리쬐던 햇빛도 기운을 조금씩 잃어가고, 시원한 바람이 불자 마른 잎이 하나둘 끈적거렸던 거리를 덮고 있었다. 백군은 덕이를 찾아왔다. 날씨가 좋으니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덕이는 백군에 이끌려 한강을 건너고 광화문에 있는 멋진 다방에 들어갔다. 한강을 건너면서 바라본 서울은 어수선했지만, 바람이 안겨준 상쾌함은 복잡한 덕이의 마음을 달랬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서 차를 주문했다. 차를 주문하는 일들은 백군이 세련되게 다했다. 백군은 소문 따위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지만, 왜 준기를 만났으며 자신과의 결혼에 대한 다른 생각이 있는지 등을 묻고 싶었다. “그 사람은 왜 만나셨나요?” 백군이 묻자 덕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왜 이런 소문이 났는지 묻고 다시는 나를 힘들게 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덕이의 차분한 대답에 백군은 기분이 좋아졌다. 백군은 결혼을 앞두고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생기는데, 이런 소문은 자기를 너무 힘들게 했다고 털어놨다. 백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덕이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들이 자꾸 떠올랐다. 준기를 만나서 따지려 물었을 때 “밥은 먹었냐?” 고 물으며 따뜻하게 웃어주고 “소문이 진짜였으면 좋겠네요.”라며 고개를 떨구고, “저 취직했어요, 덕이 씨한테 제일 먼저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저는 정말 덕이 씨를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는 이런 준기의 모습이 모두 진실되어 보였고 자꾸 가슴이 뛰는 걸 당황스럽게 받아들였던 상황들이 백군을 앞에 두고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얘기하던 백군은 덕이가 자신의 얘기를 듣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왠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이의 집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포나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강 건너 영등포의 집들이 하나 둘 불을 켜고 있었다. 왠지 덕이는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집에 도착한 덕이는 이대로 결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백군이 싫지도 않은데 왜 이런지 자신도 궁금해졌다.
다음날 오빠와 가족들 몰래 덕이는 집을 나섰다.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집을 나서고 있었다. 준기가 다닌다는 회사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만약 백군과 파혼을 하고 이 사람과 산다면 나는? 주변 가족들과 사람들은? 자기가 또 자기 자신 이외의 주변을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이건 내 인생이야. 평생 내가 살아야 하는 거라고’ 덕이의 독백과 다짐이 이어지고 있을 무렵 마침 차를 몰고 출장길에서 돌아오던 준기는 덕이를 발견했다. “덕이 씨 맞나요?”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설마, 나 보러 오신 건가요?” “그런 거 면 좋겠는데” 순식간에 준기의 입에서 여러 개의 질문이 쏟아졌다. 순간 덕이는 기다리던 사람이 왔는데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덕이가 말을 꺼냈다. “준기 씨를 보러 왔어요.” “시간 좀 낼 수 있나요?” 준기는 뛸 듯이 기뻤다. 출장에서 돌아오던 길이라 회사에 보고는 하고 나와야 할 것 같아서 준기는 안절부절못했다. 덕이는 침착하게 기다릴 테니 일을 다 처리하고 오라고 했다. 준기는 덕이를 회사 문 앞에 세워둘 수가 없어서 어디 가있을 곳을 찾으려 했으나, 덕이는 한사코 괜찮다고 했다. 한 시간쯤 시간이 더 흐른 뒤 덕이와 준기는 다시 만났다. 조금 한적한 다방을 찾아 둘은 마주 앉았다. 다방은 한적한 곳이라도 백군과 같던 곳과는 다르게 시끌벅적하고 음악 소리도 컸다. 덕이는 물었다. “나에 대한 감정은 뭔가요?” “장난이라면 이제라도 그만두세요.” 라며 말을 더 이으려 하자, 준기는 덕이의 말을 가로챘다. “저는 추운 겨울에도 내복을 입을 수 없는 가난한 놈이었어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따뜻한 눈길을 받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몰랐어요. 덕이 씨를 처음 본 날부터 저는 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두근거렸고, 스치듯 본 눈길인데도 따뜻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예뻤어요. 처음으로 마음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저 여자와 꼭 함께하고 싶다고…. 전 비록 가진 건 없습니다만, 평생 덕이 씨 만 사랑할 수 있어요. 힘드시겠지만, 절 이해하기 힘드시겠지만, 이미 덕이 씨는 제 전부입니다.” 준기가 시끄러운 음악을 타고 뱉는 말들을 덕이는 꼭꼭 씹어 듣고 있었다. 준기는 자신에게 기회를 줄 수 없냐고 물었다. 이미 결혼 날짜와 모든 준비가 끝나가는 것도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도 기회를 줄 수 없냐고 재차 물었다.
덕이는 이 사람의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보다, 더 큰 연민이 밀려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덕이는 며칠째 두문불출 말을 하지 않았다. 식사 때도 보이질 않았다. 가족들은 결혼 앞두고 이런저런 걱정이 많아서일 거다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덕이는 엄마를 찾았다. 근심 어린 눈으로 덕이를 바라보던 덕이 엄마는 “이것아, 시집가기 전에는 다 싱숭생숭한 거야”라며 말문을 먼저 열어주었다. 덕이의 엄마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덕이의 생각을 빨리 알아야겠다는 심사였다. 덕이는 엄마의 말을 받아 “엄마, 나 이 결혼 안 할래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덕이 엄마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별로 놀라지도 않으면서, “왜? 이유가 뭐니?” “백군이 마음에 안 드니? 아니면, 그 사람 때문이니?”라고 물었다. 덕이는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고 엄마를 바라보며 “엄마, 자꾸 준기 씨가 마음에 걸려 그리고 같이 있으면 뭔가 두근거리고 자꾸 끌려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어요.” “처음엔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미스터 백은 좋은 사람인데 나를 설레게 하질 않아”라고 말했다. 엄마는 덕이의 손을 잡으며 “여자는 좋은 조건의 남자를 만나는 게 좋은 거야. 가난한 집에 가봐야 너만 고생한단다. 그냥 한 순간 일 테니 마음잡아라.”라고 다독였다. 덕이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엄마, 그 사람은 나 없으면 안돼.” “나 그 사람한테 가게 해줘요.” 덕이의 엄마는 단호하게 안된다 고 했다. 줄다리기를 계속하다 덕이의 엄마는 “네 오빠가 알면 난리가 날 거니까 말조심하고 있어.”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떴다. 덕이의 마음은 바빴다. 결혼식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이는 준기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하고 또 집을 나섰다. 전처럼 무작정 준기의 회사 앞에서 기다렸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나오고 있는데, 좀처럼 준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자가용 한 대가 덕이 앞에 멈췄다. 준기였다. 사정이 있어 사장님 차를 가지고 퇴근 해야 했던 것이다. 자기 차는 아니지만, 한껏 목소리를 높여 덕이를 차 안으로 불렀다. “어서 타세요.” 덕이는 그 차에 몸을 싣고 말없이 준기가 데리고 가는 곳으로 갔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덕이는 이대로 끝없이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적한 강가에서 둘은 누가 그렇게 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나란히 걸었다. 덕이가 말을 걸었다. “이 강은 어디까지 가나요? 끝이 어딘가요?” 준기는 놀란 눈으로 “바다로 가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하자 덕이는 “준기 씨, 정말 저를 사랑하나요? 그 먼 곳까지 아니 세상 끝나는 곳까지 나를 데려갈 수 있어요?”라고 묻는 덕이의 말을 듣자마자 준기의 심장은 터질 듯 뛰었다. 말까지 더듬으며 “저, 저를 한 번 믿어 봐요. 어디든 덕이 씨 랑 함께 면 갈 수 있어요.”
덕이는 준기와 밀월을 준비했다. 결혼을 깰 방법은 지금으로선 없어 보였다. 결혼식을 한 달가량 앞두고, 덕이는 백군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가족에게는 준기와 살림을 차리겠다는 쪽지를 남기고 집을 나왔다. 화들짝 놀란 백군은 덕이의 집을 찾았다. 덕이의 오빠도 화를 못 참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백군에게는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말 미안하네. 내가 이것을 꼭 찾아서 데려다 놓겠네.” 라며 횡설 수설 했다. 백군은 덕이의 엄마에게 “어머님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덕이 씨 마음엔 누가 있나요?” 덕이의 엄마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백군, 우리가 미안하네. 자식이 마음대로 되질 않네. 아무래도 덕이가 돌아온다 해도 이대로 결혼은 어려울 것 같네.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구먼.” 덕이 엄마는 긴 숨을 내쉬며 자리를 떴다. 백군도 돌아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백군도 덕이를 많이 좋아했던 터라 지금의 상황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속을 태웠다. 백군은 집으로 돌아와 애꿎은 가족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못 배웠느니, 아빠가 일찍 죽었느니, 그런 시각으로 사람을 삐딱하게 보니 사람이 떠나죠.”라며 원망을 쏟아냈다. 백군의 엄마는 “그게 왜 내 탓이니, 차라리 잘됐다. 못 배워서 그런지 상식에도 없는 짓을 하는구나. 너도 마음 접어라. 좋은 혼처는 널리고 널렸다.”라고 차갑게 쏘아대자 백군은 흐느끼듯 “저는 덕이 씨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제발 그렇게 얘기하지 말아요.”라며 방으로 들어갔다. 백군이 방 안에서 어떻게든 덕이의 마음을 돌릴 생각에 몰두하는 동안 백군의 엄마는 속은 타지만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덕이가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했죠?" "지금 가요 우리"라고 말하는 덕이를 보며, 이런 상황을 상상도 못 해본 준기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덕이의 용감한 행동이 부럽고 부끄러웠다. "그래요 갑시다."준기는 덕이를 바라보며 결심한 듯 말을 하고 예정된 건 없었지만, 급하게 휴가를 내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어디를 갈지 정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시외로 가는 버스 터미널로 가서 가장 빠른 표를 샀다. 덜컹거리는 버스는 두 사람을 미지의 세계로 함께할 미래로 인도하고 있었다. 덕이와 준기는 수안보 근처의 여관에 머물게 됐다. 준기는 아무것도 준비 못한 게 너무 미안했다. 덕이는 그런 마음을 아는 듯 괜찮다고 했다. 준기는 덕이의 강단 있는 모습에 또한 번 놀라며 고마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험난한 여정을 서로 알고 있다는 듯 말없이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준기는 정식으로 결혼 승낙을 받고 결혼식을 할 때까지 자기에게 와준 덕이를 지켜주고 싶었다. 이틀이 지나던 날 덕이는 준기에게 말했다. “하나만 약속해 줘요.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 함께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 줘요.” 준기의 뺨에는 눈물이 흘렀다. 준기는 울먹이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약속 지킬 테니 옆에만 있어줘요 “ 준기는 힘주어 말했다. 처음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깊게 안았다. 처음으로 덕이는 준기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침착해진 후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 결혼 승낙을 받아낼 계획을 만들었다. 모든 계획은 덕이가 주도했다.
-가난한 사랑-
배고픔은
참을 수 있어요.
때가 되면 무엇으로도
허기를 채울 수 있죠
사랑의 허기는
참을 수 없어요.
그 사람이 아니면 무엇으로도
허기를 채울 수 없죠
사랑은
꼭 부유해야 하나요.
부유하지 않아도
사랑은 가난하지 않아요.
사랑은
약속이죠
사랑하는 사람의 약속은
영원을 함께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