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역경
가을바람은 유난히 쓸쓸하게 백군의 가슴을 쓸었다. 파혼에 따른 주변의 시선보다 덕이를 마음에서 지워야 하는 고통이 더 컸다. 백군의 집안과 부모님은 실연은 다른 사랑으로 채우면 된다고 서둘러 혼처를 알아보고 있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부터는 퇴근해서 오는 아들에게 축 처진 어깨 좀 펴라고 하면서 여러 처자들의 사진들을 내밀기 시작했다. 백군의 어머니는 사진을 내밀며 “이 아가씨 어떠니? 대학도 나오고 집안도 좋은데”라며 백군의 눈치를 살폈다. 백군은 어머니의 이런 모습이 싫었다. 회사에서는 백군을 미국 지사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백군의 결혼 등 상황을 보고 있었고, 지금 상황은 더욱 발령내기가 어려운 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백군은 작심한 듯 미국지사 발령을 내달라고 자원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가겠다고 했고, 회사는 반기는 분위기였다. 정식 발령이 난 날 저녁에도 백군의 어머니는 여러 혼처를 가지고 아들에게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백군은 식사를 물리고 “어머니, 저 미국지사 발령 났어요. 봄에 나가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미국 지사 나갈 준비를 해야 해서 당장 결혼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백군의 어머니는 “그럼 서둘러 결혼해서 같이 가면 되지 그 먼 타국에서 어찌 혼자 지낼 생각을 하니?”라며 마음을 졸였다. 백군은 어떻게 배경과 사진만 보고 결혼을 할 수 있으며 그런 결혼을 해서, 미국까지 같이 갈 사람을 구하는 건 평생 같이할 사람을 구하는 일 같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백군의 어머니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덕이는 준기와의 결혼 준비를 하며, 오빠에게 허락받고 싶었다. 덕이 오빠의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고, 준기는 늘 덕이 오빠 앞에서 주눅 들어 있었다. 준기는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어서 취직은 됐지만, 학력 등 이력이 좋지 않아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성실하고 회사일을 척척 잘 해내서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 있지만, 회사 시스템 상 월급을 넉넉히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대학 나온 사람들이 준기보다 입사가 늦은 상황에도 2만 5천 원 정도의 월급을 받을 때 준기는 1만 2천 원 정도 받고 있었다. 월급을 받을 때면 늘 못 배운 것에 대한 화가 치밀었다. 그렇지만, 덕이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당장 필요한 것은 두 사람이 신혼살림을 차릴 곳을 마련하는 것인데 세 들어 살만한 전세금도 없을뿐더러, 월세도 만만치 않았고, 덕이가 오빠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므로 덕이도 친정으로부터 받아낼 것이 없었다. 덕이도 자신이 아무 일도 못하고 모아둔 자기만의 자산도 없는 것에 화가 났다. 결혼을 미룰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이 시간을 놓치면 영영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덕이 어머니는 아끼던 둘째 딸이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두 사람은 겨울 동안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두 사람이 새로 시작할 집을 알아보고 다녔는데, 좀처럼 주변에서는 찾아지지 않았다. 통장 일을 하는 오빠의 으름장이 동네 사람들을 돌아서게 했다. 덕이의 오빠는 덕이가 준기를 포기하길 바랐던 것이다. 집에서는 덕이오빠가 어머니에게 한 푼도 도와주지 말라고 큰 소리로 말하기 일쑤였다. 덕이는 그럴수록 오기가 났다. ‘꼭 결혼해서 잘 살고 말 거야’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동장군은 맹위를 떨치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시작해야 하는 두 사람은 그렇게 춥지만은 않았다.
백군은 회사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잦았고,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영어 공부에 몰두했다. 뭔가에 미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 머리를 식히러 밖으로 나선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게 덕이의 집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몸은 계속 덕이의 집 쪽으로 가고 있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서려는 순간 준기와 덕이가 하얀 입김을 뿜어 대며 뭔가 열심히 얘기하며 밝은 표정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그들이 눈치채기 전 고개를 돌렸다. 서둘러 자리를 피했고, 오갈 데 없는 마음은 제 멋대로 쿵쾅거렸다.
겨울은 그렇게 아무것도 매듭지어주지 않은 채 지나갔다. 준기와 덕이는 경기도 시흥에 있는 목장집 움막에 세 들기로 했다. 초원 한가운데 목초 더미를 쌓아두며 방을 만들어 가끔 주인이 이용하던 곳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 같지만, 준기와 덕이 에겐 두 사람 만의 보금자리로 좋다고 여겨졌다. 값도 많이 치르지 않아도 되고, 주인집과 떨어져 있어서 간섭도 없을 것 같았다. 준기는 운전을 하기 때문에 회사 차로 출퇴근이 가능했다. 보잘것없는 헛간이었지만 두 사람이 꿈을 키우기엔 안성맞춤 같아 보였다. 준기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덕이가 고마웠고 그리고 미안했다. 4월 준기와 덕이는 양가 집안의 일부만 모인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엄청난 대사를 치르고 하는 결혼치 곤 너무나 초라했다. 이 결혼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사람이 둘이 있었다. 백군과 덕이 오빠였다. 백군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바로 공항으로 향했고, 덕이 오빠는 끝까지 고집 피운 덕이가 미웠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도 미웠다. 백군은 덕이의 결혼을 보고 가려고 출국 날짜를 미뤄 왔었다. 고향을 박차고 오른 비행기는 백군의 무거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힘차게 날아올랐다.
준기와 덕이는 언젠가 백군과 파혼을 유도하기 위해 떠났던 밀월여행 때 갔었던 수안보로 신혼여행을 갔다.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 맞설 용기는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제대로 된 초야를 치르고 초원 한가운데 서있는 헛간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이가 들어섰고, 덕이는 뱃속의 아기와 하루 종일 대화를 했다. 큰 선물을 받은 두 사람은 너무나 기뻤다. 아이를 낳기 전에 좀 더 좋은 곳으로 거처를 옮길 생각에 준기는 마음이 바빴다. 처음 생각과는 달리 초원의 생활은 덕이를 힘들게 했다. 준기가 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덕이의 임신 소식을 들은 덕이 엄마가 먼 길을 걸어서 가끔 덕이에게 들러 주고, 주인집에서 가끔 사람이 오는 것이 전부였다. 덕이 엄마는 이렇게 사는 덕이를 보는 게 마음 아팠다. “이것아 고작 이렇게 살려고 그 난리를 폈어?”라고 핀잔을 주다가도 올 때마다 조금씩 살림에 보탤 돈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덕이는 엄마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엄마, 잘 살게 걱정 마, 응?”라고 말하며 덕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가늘게 웃곤 했다. 준기가 늦게 퇴근하는 날이면 덕이는 초원의 밤이 무서웠다. 그렇지만, 덕이는 푸른 초원과 하늘이 맞닿는 수평선을 보며 자신이 선택한 사랑을 영원까지 잘 키워가리라 다짐했다. 만삭이 되어 갈수록 병원을 자주 갈 수 없었던 덕이는 어지럼 증이 점점 심해졌다. 그리고 계절은 또 한 번의 겨울로 가고 있었다.
-덕이의 사랑 -
난 푸른 초원에
그 사람과 있어요.
하늘과 맞닿는 곳까지
우리 둘만 함께할 수 있어요.
난 부족해요.
그 사람도 부족하죠.
하늘만 알아요.
우리 둘이 함께하면 부족하지 않은 것을.
초원의 빛이
사라지기 전에
우린 커다란 집을 지을 겁니다.
우리 사랑을 닮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