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다시 또
하얀 눈으로 덮인 세상은 이유도 없이 많은 것들을 단절로 몰아갔다. 덕이의 마음은 점점 더 쇠약해져만 갔다. 영의 울음소리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견딜 수 없었다. 죽고 싶은 마음조차도 사치였다. 몇 번의 자살 시도는 모든 걸 덮어버린 눈 속으로 쇠약해진 의식과 함께 조금씩 소멸되고 있었다. 가끔 시어머니가 집에 들러 돌봐주곤 했는데, 분유를 다룰 줄 몰랐다. 분유 병에 한 숟가락 분유를 넣고 색깔이 바뀌면 영에게 분유를 물렸다. 배가 고픈 아기는 분유를 먹어도 계속 울어댔다. 날카로워진 덕이는 그것도 하나 못하냐고 시어머니에게 화를 냈다. 덕이가 해산한 뒤 한 달쯤 지나서 덕이 올케도 몸을 풀었다. 그래서 친정엄마도 자주 올 수 없었다. 눈이 어느 정도 녹을 때쯤 갑자기 다시 폭설이 내렸다. 때마침 준기도, 시어머니도, 친정엄마도 초원의 집에 덕과 아기만 남아 있는 사실을 모른 채 볼일들을 보고 있었다. 모두 누군가 옆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준기가 잠시 처가에 들렀을 때 장모님이 집에 계신 것을 보고 나왔는데 본가에 들렀더니 어머니도 집에 계신 거였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갑자기 내린 눈에 길이 끊겨 차도 갈 수 없었고, 준기는 미친 짐승이 되었다. 덕이를 소리쳐 부르며, 무릎까지 차오른 눈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 언젠가 덕이 오빠에게 물벼락 맞고 울며 걸었을 때처럼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렸다. 집에 들어선 순간 준기는 놀라운 광경을 앞에 두고 털썩 주저앉았다.
준기가 집으로 오는 시간 동안, 덕이의 시간은 몇 년이 흐른 듯했다. 덕이는 미친 사람처럼 혼자 되뇌고 있었다. ‘지금 올 사람이 없어. 영이 배고파 죽을지도 몰라. 불쌍한 우리 아가 내가 살려야 해’라고 마음을 다잡고 몸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이려다 보니 조금 신경이 남아 있던 곳까지 쥐가 났다. 드러누워 천정을 보고 있으니, 눈물이 귓불을 타고 내렸다. 울고 있는 아기를 볼 힘도 없었다. 눈물이 마를 때쯤 차가워진 눈빛으로 살기로 작정했다. 꼭 영을 지키기로 말이다. 순간 오른팔 근육이 말을 듣기 시작했다. 오른쪽 다리에도 조금씩 힘이 가는 것을 느꼈다. 덕이는 있는 힘을 다해 영에게로 기었고, 처음으로 영을 안아 젖을 물렸던 것이다. 눈물범벅이 돼서 얼굴이 어디 있는지 모를 몰골로 덕이는 영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준기를 보자 덕이는 실성한 사람처럼 아기를 안고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했다. 준기가 아기를 떼어 놓으려고 하자 덕이는 “그냥 두세요. 엄마가 돼서 처음으로 젖을 먹이는데, 아직 안 돼요. 우리 영이 배부를 때까지 기다려요” 덕이의 눈빛은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고 강인하고 차분한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준기는 흠칫 놀라며, “그래 그럽시다. 그런데 어떻게?”라고 말하자, 덕이는 “준기 씨, 나 살 거야! 그리고 영이 내가 키울 거예요.”라고 힘주어 말했다. 뭔가 솟아오르는 희열과 슬픔을 준기는 온몸으로 느꼈다. “고마워, 내가 뭐든 할게! 우리 보란 듯이 꼭 살아내자” 준기가 말을 하자, 덕이는 말을 자르며 “안 돼요, 살아내는 것만으론 부족해요. 꼭 보란 듯이 잘 살아야 해요.” 세 사람은 부둥켜안고 그렇게 꿈을 꾸며 잠이 들었다. 새벽에 잠을 깬 준기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덕이가 방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이다. 당장 둘러업고 병원으로 가고 싶었다. 덕이는 괜찮다며 침착하자고 했다. 걸을 순 없었지만, 오른쪽 팔의 마비는 완벽히 풀렸고, 허리에도 힘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덕이는 앉은 채 아기와 준기의 자는 모습을 보며 내내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다리에도 조금씩 힘이 가는 것을 느끼며, 덕이는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봄이 되자 덕이는 오른쪽 다리가 완전히 풀려 지팡이를 짚으면 조금씩 걸을 수 있는 상황으로 좋아졌다. 이제 다시 살림살이 대부분을 덕이가 해내게 됐다. 급여를 절반만 받으며 병원비를 충당하느라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나마 덕이가 알뜰하게 모아뒀던 돈이 있어서 큰 위기를 넘어가고 있었다. 가끔씩 친정엄마가 주는 돈과 하례로 받은 돈 등 준기의 월급까지 알뜰하게 모으고 있었었다. 이제는 다 바닥났지만, 덕이는 자신 있었다. 준기는 이런 덕이의 모습을 보고 서둘러 복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회사에서는 운전기사 한 사람이 귀하던 터라 준기의 복직을 반겼다. 그동안 가불한 돈도 급여에서 조금씩 떼기로 했다. 다시 희망의 불씨가 준기와 덕이와 영에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준기는 가끔 돈을 아끼려고 식사대신 맥주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 맥주 회사라 시음 음료가 늘 있었고, 가끔 먹었을 때 배가 부른 것을 알고는 맥주로 식사를 대신하는 일이 잦아졌다.
미국에서 첫 번째 겨울을 맞은 백군은 일에만 몰두했다. 식사를 거를 때가 많고 업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일을 마치면 영어 공부를 몇 시간이고 했다. 놀라운 집중력으로 소통에 문제없는 정도가 아니고 업무에 필요한 제안 발표도 영어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덕이를 잊으려고 일과 공부에 집착했던 것이다. 성실하고 실력 있는 백군의 모습은 여러 사람의 호감을 샀다. 여러 경로를 거쳐 중매가 들어오기도 했으나 백군은 한사코 거절하곤 했다. 백군이 초희를 만난 건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뉴욕의 한 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에 백군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눈앞에 덕이가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교정을 걷고 있던 아가씨의 어깨를 잡아채며, “덕이 씨!”라고 불렀다. “누구시죠?” 이 상황이 별로 놀랍지도 않은 듯 초희는 되물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이군요?” “이 학교 다니나요?” 초희가 몇 가지 질문을 쏟아내는 동안 백군은 덕이와 너무나 닮은 초희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백군의 답을 기다리며 빤히 쳐다보고 있는 초희에게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한국분이시군요?” “저는 이 학교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길이고 이 학교 학생은 아닙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라고 정중히 말하고 돌아서는 백군에게 초희는 “그냥 가는 게 어딨 어요? 이렇게 먼 타국에서 같은 말 쓰는 사람을 불러 세웠으면 커피라도 한 잔 사야죠.”라고 말하자 백군은 당황하며 “그 그럼, 언제…?”라고 말을 더듬자 초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 학교 앞 잉글랜드라는 카페가 있어요. 토요일 11시에 만나요. 참 나는 이 학교 다녀요. 그리고, 바람 맞히기 없어요. 알았죠?”라고 말하고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백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향기로운 화장품 냄새를 남기고 휙 사라져 갔다. 봄은 또 그렇게 오고 있었다.
-다시 또-
끝인 줄 알았죠
모든 걸 다 볼 수 없게 되더라도
내 영혼의 흔적을
당신이 봐주길 원했어요.
난 알았어요.
그것이 얼마나
당신을 아프게 하는 것 인가를
그래서 당신을 지키기로 했어요.
다시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