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희망
덕이의 병세는 봄이 되면서 더욱 호전됐다. 새싹이 움트고 생명의 기운이 초원을 덮을 무렵, 덕이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 스스로 초원을 걷게 됐다. 풀냄새, 지저귀는 새소리 남쪽에서 부는 바람까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마음으론 어릴 때처럼 달리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 밥을 짓고, 영을 업어보고 덕이의 의지는 하늘에 닿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왼쪽 다리와 왼쪽 팔의 마비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오른쪽이 돌아왔으니, 왼쪽의 마비도 풀릴 거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준기가 출근하고 난 후, 덕이는 영을 업고 지팡이 없이 걸어보기로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혼자서 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세 발짝도 못 가서 덕이는 넘어지고 말았다. 영을 업고 넘어지는 바람에 영도 얼굴에 상처가 났다. 우는 영을 안고 힘겹게 집 안으로 들어와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가며, 아이를 달랬다. 한참이 지나자 놀란 영도 지쳐 잠이 들고, 움직이지 않는 외팔을 주무르며, 또다시 주문을 외듯 ‘다시 돌아올 거야.’를 반복해서 되뇌었다. 저녁이 되자 준기가 일찍 퇴근해서 왔고 영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예요?” 준기가 묻자, “미안해요. 혼자서 걷고 싶었어요.” 고개를 떨구며 덕이가 말했다. 준기는 “지금 많이 좋아졌으니, 시간이 좀 지나면 전처럼 될 거니까 조급해하지 맙시다.”라며 덕이를 다독였다. 준기는 걱정이 됐다. 초원 한가운데 전처럼 덕이와 아이가 혼자 남겨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모은 돈을 치료비로 거의 다 써서 달리 방도가 없었다.
5월이 되자 꽃이 만발하고 영도 조금 살이 붙기 시작했다. 덕이는 왼쪽다리에 힘이 조금씩 들어가기는 했지만 좀처럼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덕이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았던 것처럼 절뚝거리며 걸었다. 준기는 이제 시장도 다니고 해 보자고 했다. 덕이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 수군거림, 이런 것들을 아직 감당하기 어려웠다. 준기는 시간이 필요함을 알았다. 그리고, 준기는 이리저리 돈을 구해보려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고 다니곤 했다.
뉴욕의 봄은 백군과 초희의 만남처럼 활기찼다. 잉글랜드라는 카페에서 초희를 만나기로 한 것을 깜빡 잊고 있던 백군은 사무실에서 창밖을 보며 휴식을 취하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지나가는 여인을 보고, 초희와의 일이 생각났다. 시간은 이미 약속 시간보다 30분이 지나고 있었고, 덕이를 쏙 빼닮은 초희가 궁금했다. 순간 미친 듯 뛰어서 약속 장소로 나갔다. 카페 잉글랜드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한 젊은이들의 공간이었다. 시끄러운 음악과 사람들 사이를 뚫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덕이를 닮은 동양 여자를 찾았다. 초희는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뭔가를 미친 듯 찾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기도 하고 웃음이 났다. 백군은 실없이 웃으며 카페 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보니 봄기운이 완연했다. 걸치고 있던 양복저고리를 벗어 어깨에 걸치고 고개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실없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뉴욕의 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걸음을 옮기고 있는 찰나에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게 온 주제에 그것밖에 안 찾아보고 그냥 가나요? 내가 그렇게 만만해요?”뉴욕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한국말은 백군에게 하는 말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자, 초희가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서서 백군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고 있었다. 백군은 깜짝 놀라며 초희에게 다가가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초희를 달래려 했다. 씩씩거리는 초희의 모습은 성격은 완전 딴판이지만 덕이와 너무나도 닮았다. 카페 ‘잉글랜드’를 가리키며 “저기서 나왔으니 다시 가기는 그렇고 근처 공원에 가죠” 백군은 초희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커피를 한잔씩 사 들고 공원 벤치에 앉았다. 백군은 티 없이 맑고 당차 보이는 이 여인이 궁금해졌다.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백군에게, 초희는 “할 말이 그렇게 없어요? 미안하다 한마디 하고 거의 말 안 한 것 아시죠?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백군은 “아, 네네, 저는 순도라고 합니다. 백순도! 오늘은 여러 가지로 실례를 많이 하네요. 미안합니다.”라고 말을 마무리하자, “뭐예요? 그땐 나한테 덕인가,라는 이름으로 불러놓고 내 이름은 안 물어봐요? 자존심 상하지만 내 이름은 가르쳐드리죠. 나초희, 내 이름은 나초희에요. 메너 없는 백순도 씨.”라고 말하며 삐쭉거렸다.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툭툭 쏘아붙이는 초희가 백군은 싫지 않았다. 백군은 초희에게 오늘 미안했으니, 저녁을 사겠다고 했고, 두 사람은 저녁 식사 후 헤어지는 자리에서 백군이 다시 만나자고 애프터 신청을 하면서 다시 만나게 됐다.
준기는 자신의 취직을 도와준 김 상사를 찾았다. 김 상사에게 염치없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돈을 빌려 줄 것을 부탁했다. 김 상사는 준기에게 “양 병장, 힘내, 내가 어떻게 해볼게”라고 말하며, 준기의 손을 잡아 주었다. 김 상사는 늘 준기가 측은 했다. 집으로 돌아온 준기는 덕이에게 김 상사가 도와줄 것 같다고 얘기하고, 일요일에 같이 집을 구하러 다녀보자고 했다. 덕이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제 다시 세상에 나가자. 영을 위해서도 그래야 해.’라고 다짐을 하고 일요일을 기다렸다. 일요일이 되자 친정집에 들러 영을 맡기고 다니자고 했으나 준기는 우리가 안고 다니자고 했다. 준기는 영을 볼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같이 있고 싶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부동산을 찾아 세놓는 집을 알아보고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첫 번째 들린 집부터 두 사람을 기운 빠지게 했다. 주인집 여자는 “아이고, 우리는 애 있는 집은 안 받아요. 애엄마 몸도 성치 않고, 다른 집 알아보세요.” 날이 저물도록 돌아다녔으나, 세 식구에게 셋방을 내주는 집을 찾지 못했다. 하루종일 돌아다니느라 힘들었는데, 돌아가는 길 동네 언덕에서 하나, 둘, 집집마다 불이 켜지는 것을 보고 덕이는 눈물이 났다. ‘저렇게 많은 집들이 있는데 우리 세 식구 살집이 없다니, 우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니 설움 더했다. 그리고, 자신이 불구라 세를 주지 않는 집도 있었기 때문에 참담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준기는 “힘들었지? 다음 주에 또 찾아봅시다. 난 실망 안 해, 좋은 집주인 만나서 살게 될 거야.”라고 말하며, 자신의 울적한 마음도 함께 다독였다.
준기는 덕이가 더 실망하지 않게 집을 구하는 일을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고 얘기했다. 덕이는 “나, 괜찮아요. 우리 함께 알아봐요.”라고 말하며, 준기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준기는 월요일 출근해서 점심시간에 또 김 상사를 찾았다. 일요일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죄송하지만 자꾸 상사님만 찾게 되네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아, 어깨 펴! 이게 뭔가 이젠 가장인데, 나도 좀 알아볼 테니, 너무 걱정 말게. 다 살게 마련이야.” “아직 점심 못 먹었지? 밥이나 먹으러 가지.”라고 말하며, 김 상사는 준기를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밥을 먹으며, 김 상사는 이리저리 분주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번 토요일쯤 나한테 다시 와 봐.”라는 김 상사의 말을 뒤로하고 준기는 회사로 복귀했다. 준기는 좀처럼 마음이 잡히지 않아, 습관처럼 시음용 맥주를 마셨다. 퇴근길에는 깜박 사고가 날뻔하기도 했다. 준기는 자신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치려고 노력했다.
주말이 되자 준기는 김 상사와 다시 만났다. 김 상사는 싱글벙글하면서,“ 내가 뭐랬나? 다 살길 있다고 하지 않았나? 영등포 외곽에 강 씨라는 분이 사는데 그 집 문간방을 자네에게 세주기로 했네. 자네 사정도 다 알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되고, 부엌도 방과 붙어 있어서 주인집과 같이 안 써도 되니 좋지 않나? 내일이라도 이 주소로 가보게.”라며 주소가 적힌 종이를 주며 싱글벙글했다. 준기는 뛸 듯이 기뻤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준기는 덕이를 꼭 안았다. 낮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흥분해서 내일 가보자고 했다. 모처럼 밝게 웃는 준기를 보니 덕이도 기분이 좋았다. 일요일 아침, 준기네 세 식구는 강 씨 집으로 향했다. 강 씨는 나이 드신 영감님이었다. “댁이 그 김 상사가 얘기한 그 사람 이군요.” 강 씨는 말투에서도 교양이 묻어났다. “네, 어르신.”라고 답하며, 준기가 인사를 했다. 세 식구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강 씨는 대문 옆에 있는 방을 가리키며, “저기 저 방이니 가보게.”라고 말하고, “고 녀석 참 잘 생겼네!”라며, 영에 대한 칭찬도 빠뜨리지 않았다. 준기와 덕이는 집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한옥이라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운데 마당이 있고, 주인집 안채와는 떨어져 있어서, 아기가 울어도 부담이 없었다. 준기네 식구가 방을 보고 오자, “마음에 들어요?” 강 씨가 물었다. “네, 어르신.” 준기가 답했다. 비어 있으니 언제든 들어와 살아도 되는데 날짜를 알려주면 도배를 새로 해주겠다고 까지 했다. 그리고, “이다음에 집 살 때까지 여기서 살아. 그래도 되니” 처음으로 말을 놓으며, 준기네 식구를 응원했다. 덕이는 강 씨를 강 씨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두 사람은 초원에서 벗어나 환경이 좀 좋은 곳에서 영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날은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보금자리 -
세상을 기울이며 걸어도
나는 다르지 않아요.
나에게도 우주가 있죠.
절름발이 인생은
누구도 원해서 시작되지 않아요
누구나 될 수 있죠.
내가 몰랐던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운명은 그렇게 침착하지 않아요.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보금자리가 필요하죠.
집보다 더 큰 마음의 보금자리가
2. 새 울타리
봄날이 끝나기 전에 강 씨 할아버지 댁으로 준기와 덕이는 이사를 했다. 강 씨 할아버지가 도배를 새로 해 준 덕분에 산뜻한 풀냄새가 낫다. 무엇 하나 부러울 필요가 없었다. 마당 한가운데는 펌프가 있어서 물을 쓰는 데 문제가 없었고, 몸이 불편한 덕이는 초원에서의 생활보다 한결 좋아진 환경이 마음을 더 강하게 다지게 만들었다. 집 구조가 똑같지는 않지만, 덕이가 살던 집 구조와 비슷하기도 해서 정감마저 들었다. 준기 또한 훨씬 가까워진 직장과 주인집 어른들이 있어서 덕이 혼자 집에 있어서 일하면서도 노심초사했던 부분들이 다소 해결돼서, 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주인집에는 전화도 있어서 급할 때는 덕이에게 연락도 할 수 있었는데, 강 씨 할아버지는 흔쾌히 전화 사용을 허락했다. 이사하던 날 덕이 엄마는 말없이 부엌 한쪽에서 울음을 삼켰다. 절뚝거리며 이삿짐을 나르는 덕이 손을 낚아채며, 덕이 엄마는 궤 춤에 손을 넣어 돈이 든 봉투를 덕 이에게 주며, 덕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잘 견뎠어. 잘 살 거야, 혹시 오빠가 뭐라도 주거든 받거라. 나한테 이거 받았다는 얘기 하지 말고” 눈물을 참고 덕이의 뺨을 한동안 어루만지며 덕이 엄마는 말했다. 덕이는 엄마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그리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저녁이 되자, 강 씨 할아버지가 “집구경 왔어요” 하면서, 문을 두드렸다. “정리는 다 됐나? 도배는 맘에 들어요?”라고 묻더니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정신없을 테니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먹읍시다.”라며 저녁 초대를 했다. 이런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고, 애 딸린 절름발이라고 세주기 싫다고 거절만 당하던 덕이로써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사와 정을 느꼈다. ‘이제 내 몸만 건강해지면, 우린 보란 듯이 잘 살 거야.’ 덕이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특별히 고기까지 구워주신 강 씨 할아버지는 준기와 덕이가 밥을 한 숟가락씩 뜰 때마다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결혼하고 처음으로 준기 친구와 회사 동료들을 초대해 집들이도 했다. 처음으로 집에 지인들을 초대한 준기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덕이 또한 이런 기쁨이 준기에게 오래 지속되길 바라며, 손님 대접을 열심히 했다. 이 자리에는 강 씨 할아버지를 소개해 준 김 상사도 있었다. 김 상사와 강 씨 할아버지는 어떤 사이인지 무척 친해 보이기는 했으나, 김 상사는 강 씨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준기에게 말해주지는 않았다. 김 상사는 강 씨 할아버지께 준기 내외를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기가 불편하지 않게 다시 오마, 얘기하고 그렇게 준기 집을 나섰다. 덕이 오빠는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덕이 오빠는 덕이 동생에게 돈을 들여보내며, 엄마가 주는 것이라며 전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덕이는 오빠가 보낸 것을 알았다.
백군은 초희와의 만남이 잦아졌다. 가끔 초희의 톡톡 튀는 행동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같이 있을 때는 마법처럼 시름을 잊기도 했다. 봄이 끝나갈 무렵, 초희는 갑자기 물었다. “ 나 어때요?” 백군은 당황하며 “네?”라고 되묻자, “나 어떻냐고요? 예뻐요? 스타일은? 맘에 들어요? 내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네, 초희 씨는 예쁘죠.”라고 백군이 말하자. “그럼, 나랑 결혼할래요?”
“뭐 남자만 청혼하란 법 있나요?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갑작스러운 청혼에 백군은 당황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말 이 여인을 사랑하는 걸까?’‘아니, 사랑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초희가 버럭 화를 냈다. “싫으면 싫다고 말씀하세요. 나도 인기 많다고요.” 하며, 홱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백군은 화들짝 놀라서 뛰어가 초희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리고 거칠게 초희를 끌어안았다. 초희는 당황했지만, 그대로 몸을 맡긴 채 백군의 시간을 허락했다. 포옹을 끝내고 초희의 양어깨를 잡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백군은 “정말, 나랑 살래요?”“날 사랑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사랑하고 있어요.” 초희가 대답했다.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 백군은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하자고 얘기하고 날을 잡아 양가 부모님을 만나자고 했다. 초희와 백군은 서울에 계신 각자의 부모님께 이 소식을 전했다. 초희의 부모가 이것저것 궁금하고 걱정이 많은 것에 비해, 백군의 집에서는 반기는 분위기였다.
여름이 되자, 덕이의 몸은 조금 더 좋아지는 모습이었다. 영이 살이 붙고 옹알이가 늘어 주인집에서도 인기 만점이었다. 강 씨 할아버지 내외는 몸이 불편한 덕이를 도와주려고 영을 봐주곤 했지만, 점점 더 아기의 재롱에 빠져들곤 했다. 어떤 날은 덕이와 준기가 깨지도 전에 문밖에서 영을 데려가려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뜨거운 여름은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준기의 회사 생활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강 씨 할아버지 내외는 준기네가 정말 친자식 같은 느낌으로 정을 나눠 주었다. 아버지의 정을 받지 못한 준기는 강 씨 할아버지를 아버지처럼 따르곤 했다. 가을을 지나며 모든 것이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지만, 덕이의 왼쪽 다리와 팔은 끝내 마비 증상이 풀리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왼손과 마치 소아마비를 앓은 것처럼 다리를 절었다. 어떤 때는 심하지 않아 보였지만, 외쪽 다리는 끄는 듯한 모습으로 걸어야만 했다. 덕이는 걸어서 장도 보고 대인 기피증도 잘 극복해 냈다. 가을이 깊어 갈 무렵 영은 돌이 되지도 전에 걷기 시작했다. 덕이와 준기는 영의 돌잔치를 가능한 식구들을 모두 불러 성대하게 하고 싶었다. 덕이의 체력으론 둘 사이엔 영이 유일한 자식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들뜬 가을은 그렇게 찬바람을 마중하고 있었다.
마침 졸업반이던 초희는 가을이 되기 전 학기를 마치고 귀국할 준비를 했다. 백군의 미국 생활도 마치 때가 됐다는 듯 본사 발령이 났다. 때를 맞춰 함께 귀국한 백군과 초희는 양가를 인사차 방문하기로 했다. 백군이 먼저 초희의 부모님을 뵙기로 했다. 백군의 차분하고 듬직한 모습을 보고 초희 부모님은 안심하는 모습이었다. 초희의 아버님은 은퇴했지만, 법조인 출신이었고, 초희는 집안의 막내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어리광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떼를 쓸 때가 있지만, 백군이 보기엔 귀여운 정도로 보였다. 초희의 부모님은 철없어 보이기만 하던 초희가 듬직한 사윗감을 데려온 것에 만족하고 기특했다. 초희 부모님을 만난 다음 주에 백군은 초희를 자기 부모님께 소개했다. 백군의 부모님은 초희의 집안과 밝은 초희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 봤을 때는 덕이와 너무 닮아서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그래서 백군을 따로 불러 어떤 마음인지 물었다. 백군은 그냥 초희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전혀 다른 성격이고 발랄한 초희의 모습은 차분한 백군을 잘 이끌어 줄 것으로 기대도 되었다. 한 달 뒤 갖게 된 부모님 상견례는 양가 모두 흡족하게 마무리됐다. 돌아오는 봄에 결혼식을 하기로 하고 두 사람은 각자의 귀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초희는 하얀색 자가용을 몰고 백군을 만나러 갔다. 놀라서 쳐다보는 백군에게 “아빠한테 졸라서 샀어요. 자기 같은 사윗감 데려왔다고 아빠가 허락했죠.”라며 배시시 웃었다. 백군을 옆에 태우고 “아직 초보니 각오 단단히 하세요.”라며 차를 몰았다. 그렇게 이들의 차창으로도 초겨울 바람이 열기를 식히며 불기 시작했다.
- 닮은 사랑 -
내 사랑은 닮았어요
그렇지만 새롭죠
다른 사랑은 필요 없어요.
나에겐 이 사람뿐이죠.
새 사랑이 와도
내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죠
언제나 그 자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