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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준SimonJ Nov 22. 2024

2부. 잔인한 겨울

4. 다시 또

하얀 눈으로 덮인 세상은 이유도 없이 많은 것들을 단절로 몰아갔다덕이의 마음은 점점 더 쇠약해져만 갔다영의 울음소리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견딜 수 없었다죽고 싶은 마음조차도 사치였다. 몇 번의 자살 시도는 모든 걸 덮어버린 눈 속으로 쇠약해진 의식과 함께 조금씩 소멸되고 있었다가끔 시어머니가 집에 들러 돌봐주곤 했는데분유를 다룰 줄 몰랐다분유 병에 한 숟가락 분유를 넣고 색깔이 바뀌면 영에게 분유를 물렸다배가 고픈 아기는 분유를 먹어도 계속 울어댔다날카로워진 덕이는 그것도 하나 못하냐고 시어머니에게 화를 냈다덕이가 해산한 뒤 한 달쯤 지나서 덕이 올케도 몸을 풀었다그래서 친정엄마도 자주 올 수 없었다눈이 어느 정도 녹을 때쯤 갑자기 다시 폭설이 내렸다때마침 준기도시어머니도친정엄마도 초원의 집에 덕과 아기만 남아 있는 사실을 모른 채 볼일들을 보고 있었다모두 누군가 옆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준기가 잠시 처가에 들렀을 때 장모님이 집에 계신 것을 보고 나왔는데 본가에 들렀더니 어머니도 집에 계신 거였다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 갑자기 내린 눈에 길이 끊겨 차도 갈 수 없었고준기는 미친 짐승이 되었다덕이를 소리쳐 부르며무릎까지 차오른 눈길을 달리고 또 달렸다언젠가 덕이 오빠에게 물벼락 맞고 울며 걸었을 때처럼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렸다집에 들어선 순간 준기는 놀라운 광경을 앞에 두고 털썩 주저앉았다


준기가 집으로 오는 시간 동안덕이의 시간은 몇 년이 흐른 듯했다덕이는 미친 사람처럼 혼자 되뇌고 있었다. ‘지금 올 사람이 없어영이 배고파 죽을지도 몰라불쌍한 우리 아가 내가 살려야 해라고 마음을 다잡고 몸을 움직이려고 애썼다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이려다 보니 조금 신경이 남아 있던 곳까지 쥐가 났다드러누워 천정을 보고 있으니눈물이 귓불을 타고 내렸다울고 있는 아기를 볼 힘도 없었다눈물이 마를 때쯤 차가워진 눈빛으로 살기로 작정했다꼭 영을 지키기로 말이다순간 오른팔 근육이 말을 듣기 시작했다오른쪽 다리에도 조금씩 힘이 가는 것을 느꼈다덕이는 있는 힘을 다해 영에게로 기었고처음으로 영을 안아 젖을 물렸던 것이다눈물범벅이 돼서 얼굴이 어디 있는지 모를 몰골로 덕이는 영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준기를 보자 덕이는 실성한 사람처럼 아기를 안고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했다준기가 아기를 떼어 놓으려고 하자 덕이는 그냥 두세요엄마가 돼서 처음으로 젖을 먹이는데아직 안 돼요우리 영이 배부를 때까지 기다려요” 덕이의 눈빛은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고 강인하고 차분한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준기는 흠칫 놀라며, “그래 그럽시다그런데 어떻게?”라고 말하자덕이는 준기 씨나 살 거야그리고 영이 내가 키울 거예요.”라고 힘주어 말했다뭔가 솟아오르는 희열과 슬픔을 준기는 온몸으로 느꼈다. “고마워내가 뭐든 할게우리 보란 듯이 꼭 살아내자” 준기가 말을 하자덕이는 말을 자르며 안 돼요살아내는 것만으론 부족해요꼭 보란 듯이 잘 살아야 해요.” 세 사람은 부둥켜안고 그렇게 꿈을 꾸며 잠이 들었다새벽에 잠을 깬 준기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덕이가 방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이다당장 둘러업고 병원으로 가고 싶었다덕이는 괜찮다며 침착하자고 했다걸을 순 없었지만오른쪽 팔의 마비는 완벽히 풀렸고, 허리에도 힘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덕이는 앉은 채 아기와 준기의 자는 모습을 보며 내내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다리에도 조금씩 힘이 가는 것을 느끼며덕이는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봄이 되자 덕이는 오른쪽 다리가 완전히 풀려 지팡이를 짚으면 조금씩 걸을 수 있는 상황으로 좋아졌다이제 다시 살림살이 대부분을 덕이가 해내게 됐다급여를 절반만 받으며 병원비를 충당하느라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다그나마 덕이가 알뜰하게 모아뒀던 돈이 있어서 큰 위기를 넘어가고 있었다가끔씩 친정엄마가 주는 돈과 하례로 받은 돈 등 준기의 월급까지 알뜰하게 모으고 있었었다이제는 다 바닥났지만, 덕이는 자신 있었다준기는 이런 덕이의 모습을 보고 서둘러 복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회사에서는 운전기사 한 사람이 귀하던 터라 준기의 복직을 반겼다그동안 가불한 돈도 급여에서 조금씩 떼기로 했다다시 희망의 불씨가 준기와 덕이와 영에게 타오르기 시작했다준기는 가끔 돈을 아끼려고 식사대신 맥주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다맥주 회사라 시음 음료가 늘 있었고가끔 먹었을 때 배가 부른 것을 알고는 맥주로 식사를 대신하는 일이 잦아졌다     


미국에서 첫 번째 겨울을 맞은 백군은 일에만 몰두했다식사를 거를 때가 많고 업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일을 마치면 영어 공부를 몇 시간이고 했다놀라운 집중력으로 소통에 문제없는 정도가 아니고 업무에 필요한 제안 발표도 영어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덕이를 잊으려고 일과 공부에 집착했던 것이다성실하고 실력 있는 백군의 모습은 여러 사람의 호감을 샀다여러 경로를 거쳐 중매가 들어오기도 했으나 백군은 한사코 거절하곤 했다백군이 초희를 만난 건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었다뉴욕의 한 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에 백군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눈앞에 덕이가 있는 것이었다깜짝 놀라 교정을 걷고 있던 아가씨의 어깨를 잡아채며, “덕이 씨!”라고 불렀다. “누구시죠?” 이 상황이 별로 놀랍지도 않은 듯 초희는 되물었다그리고, “한국 사람이군요?” “이 학교 다니나요?” 초희가 몇 가지 질문을 쏟아내는 동안 백군은 덕이와 너무나 닮은 초희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었다정신을 차리고 백군의 답을 기다리며 빤히 쳐다보고 있는 초희에게 실례했습니다죄송합니다한국분이시군요?” “저는 이 학교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길이고 이 학교 학생은 아닙니다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라고 정중히 말하고 돌아서는 백군에게 초희는 그냥 가는 게 어딨 어요? 이렇게 먼 타국에서 같은 말 쓰는 사람을 불러 세웠으면 커피라도 한 잔 사야죠.”라고 말하자 백군은 당황하며 그 그럼언제?”라고 말을 더듬자 초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 학교 앞 잉글랜드라는 카페가 있어요토요일 11시에 만나요참 나는 이 학교 다녀요그리고바람 맞히기 없어요알았죠?”라고 말하고 알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백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향기로운 화장품 냄새를 남기고 휙 사라져 갔다봄은 또 그렇게 오고 있었다.     


-다시 또-

     

끝인 줄 알았죠

모든 걸 다 볼 수 없게 되더라도

내 영혼의 흔적을 

당신이 봐주길 원했어요.     


난 알았어요.

그것이 얼마나

당신을 아프게 하는 것 인가를

그래서 당신을 지키기로 했어요.     


다시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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