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굴레
며칠째 눈이 내렸다. 초원은 하얀빛으로 찬란했고, 아름다움과 차가움은 필연인 양 공존했다. 덕이의 배가 해산이 곧 다가올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불러왔고, 애칭으로 부르던 영(덕이 뱃속 태아의 예명)이 발길질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걸을 때마다 허리에 손을 짚고 걸었으며 곧 태어날 영을 위해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해를 넘기고 1월이 되자 덕이는 거동이 더욱 불편해졌다. 눈에 덮인 길이 겨우 모습을 드러낼 때쯤 갑자기 어지러웠던 덕이는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이내 쓰러졌다. 초원 한가운데 덕이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영을 위해서 덕이는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해가지고 덕이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퇴근 후 집에 도착한 준기는 쓰러져있는 덕이를 보고 놀라서 덕이를 끌어안았다. 의식을 잃은 덕이를 안고 병원으로 가려했으나, 오늘따라 차를 두고 왔기 때문에 병원까지 덕이를 옮길 방법이 없었다. 준기는 헛간에 놓인 리어카에 덕이를 싣고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도착한 병원은 한밤중이라 문이 닫혔고, 울며 병원문을 두드리는 준기에게 소란스러운 소리에 깬 병원 옆집 주인장이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같이 갑시다.” 하면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자신의 차를 몰고 큰 병원 응급실로 덕이와 준기를 데려다주었다. 하염없이 울며 고맙다는 얘기를 실성한 사람처럼 계속했다. 서둘러 나온 의사는 한참 상태를 진단하더니, 준기에게 다가왔다. 의사는 “남편이십니까?”라고 물었다. “평소에 관리를 했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임신중독 같습니다. 이대로면 아이도 산모도 모두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일단 아이부터 제왕절개 분만으로 꺼내는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며 수술에 동의해줄 것을 준기에게 종용했다. 준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덕이와 아기를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아침이 되고 하늘에서는 눈이 오기 시작했다. 긴 수술 뒤 영이 태어났고, 의사는 준기에게 “아들입니다. 그런데 산모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의식이 돌아와도 어떤 예후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최선을 다했으니 기다려 보시죠” 준기에게는 너무나 차가운 얼음장 같은 설명이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덕이 엄마는 병원으로 달려왔으나 의식이 없는 덕이를 보고 주저앉았다. 덕이 오빠는 병원에 오자마자 준기의 멱살을 잡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같은 놈한테 보내는 게 아니었어.”라며 화를 참지 못했다. 준기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덕이 엄마는 덕이 오빠에게 “그만해라, 이게 무슨 짓이야?”라며 처음으로 덕이 오빠를 나무랐다. “모두 내 말 들어, 덕이는 강한 아이니 깨어날 거야. 그리고 윤 서방! 어디 가서 밥이라도 한 술 뜨고 오게, 자네가 굳건해야 덕이를 지킬 수 있는 거야. 어서 한술 뜨고 와” 덕이의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했다. 덕이 오빠에게는 병원비를 도와줄 것을 주문했다. 준기는 떠밀려 병원 밖으로 나왔으나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덕이는 깨어나질 못하고 의사는 만약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자리를 떴다. 굶어진 눈은 어둠과 세상을 집어삼킬 듯 내렸다.
준기는 “도대체 왜 저에게 이러십니까? 하나님, 부처님, 조상님, 누가 말 좀 해주세요 도대체 왜?” 준기는 절규했다. “아니 누구라도 대답 안 해도 좋으니 우리 덕이 살려 주세요. 살려 내라고. 이 더러운 세상아” 한참을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다. 잠결인 듯 꿈인 듯 덕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덕이는 모든 것이 낯선 침대에서 준기를 불렀다. 뛸 듯이 기쁜 준기는 의사를 불렀다. 28시간 만에 돌아온 의식이었다. 덕이가 준기에게 울면서, “몸이 움직이질 않아요.”라고 말했다. 준기는 긴 시간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오는 일시적인 현상인 줄 알았다. 덕이의 손을 잡고 “깨어나 줘서 살아줘서 고마워”라며 눈물을 흘렸다. 덕이는 고생했을 준기가 안쓰러웠다. 의사들의 움직임이 수상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검사를 진행했다. 하루가 더 지난 뒤 집도를 했던 의사가 준기를 찾았다. “안타깝지만 부인께서는 앞으로 걷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간혹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은 팔도 부자유할 수 있습니다.” 의사의 말이 끝나자 걷잡을 수 없는 절망에 빠져 들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운명의 고리는 어려운 어린 시절을 견뎌낸 준기에게 또 한 번 가혹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덕이는 누워만 지내는 상황이 됐다. 준기는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었다. 덕이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회사에서는 충분히 부인을 돌보고 돌아올 것을 요구하며, 사직서를 반려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가불의 형태로 준기 급여의 50%의 급여도 준기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사장님께 고맙다는 인사로 열 번도 넘게 절을 하고 준기는 덕이의 곁으로 왔다. 준기는 덕이에게 내가 옆에 있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덕이는 불구가 된 자신보다 준기가 불쌍했다. 덕이는 준기가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 기어서 영에게 갔다. 하염없이 울며, “엄마가 미안해. 우리 아가 젖도 못주고, 그리고 용서해 줘! 이다음에 다시 볼 때까지 아빠를 부탁해”라며 영에게 얼굴을 묻고 울다가 덕이는 부엌 쪽으로 기었다. 가까이 기어가 반쯤 몸을 문턱에 걸치고 칼을 집으려 했다. 혹시 나쁜 생각을 할지 몰라 준기는 날카로운 물건들을 덕이 손이 닿지 않도록 했다. 덕이는 준기가 높이 올려놓은 칼을 집으려 안간힘을 쓰다 부엌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는 몸을 떨며 흐느꼈다. 배가 고팠는지 영이 울기 시작했다. ‘내가 엄만데, 우리 아가가 울어도 안아줄 수가 없어요. 제발 이 인생을 끝나게 해 주세요 제발.’ 덕이의 절규는 눈 덮인 초원을 가로질러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곳까지 퍼져 갔다. 이것저것 장도 보고 조금 늦게 돌아온 준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고 한동안 부엌에 쓰러져 있었을 덕이를 보고 눈물이 났다. 영이는 울다 지쳐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덕이를 안아 방으로 옮기고, 영에게 분유를 타 먹었다. 순간 덕이가 안간힘을 써 준기를 잡았다. “여보 당신 좋은 사람이야. 나 그만 포기하고 우리 영이 좋은 엄마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했다. 준기는 제발 그런 소리 말라며 끝까지 당신을 지킬 테니 제발 자기를 믿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준기는 “평생 누워 있어도 괜찮으니 영에게 엄마로 남아 있어 줘”라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덕이의 눈을 보며 말했다. 덕이의 의식은 초원을 넘어 큰 대양을 향하고 있었다.
삶의 굴레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어.
세상에 올 때도 내 의지는 없었지.
그렇게 삶은 주어졌고
삶은 제멋대로 나를 주물렀어.
난 극복할 줄 알았어.
바보처럼
내 삶은 내 것이라 믿었어.
삶의 굴레가 나를 조롱할 때까지.
그렇지만, 삶은 아직 나를 모르고 있어
난 거기에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