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인연
영의 돌잔치하던 날도 눈이 내렸다. 초원에서의 눈과는 사뭇 달랐다. 덕이는 아침부터 내리던 눈을 처음 보는 양 마당에서 입을 벌리고 하늘을 보며 두 팔 벌려 맞았다. 영은 본인의 생일날이란 걸 아는 것처럼 마당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마당에서 주인행세를 했다. 강 씨 할아버지도 싱글벙글 쳐다보다가 이 녀석아, “감기 들겠다.”“옛다 선물이다.”라고 말하며 복주머니가 예쁘게 누벼진 저고리를 영에게 입혀주며 싱글벙글 웃었다. 덕이는 한없이 기뻤다. 강 씨 할아버지께 연신 고맙다고 말하고, 영을 강 씨 할아버지에게 맡긴 채 음식 장만에 한창이었다. 준기는 이리저리 영의 돌잔치 소식을 알리고 친지들을 초대했다. 집들이 이후 또 한 번의 초대에 준기는 들뜨게 했다. 회사에서는 준기에게 손님 접대에 쓸 맥주를 선물했다. 점심이 되자 손님들이 하나, 둘 모였고 덕이 엄마는 늦게 도착한 탓에 도와주지 못 한 걸 미안해했다. 영은 돌잡이를 연필을 잡았다. 공부에 한 맺힌 준기는 그저 영이 예쁘고 또 예뻤다. 영만큼 인기 있던 것이 맥주였다. 비싸서 자주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준기의 직장을 부러워하며 덕담들이 오갔다. 덕이 엄마는 웃고는 있지만, 애 하나 낳고 불구의 몸으로 사는 딸의 모습을 보는 것이 편치는 않았다. 그래도, 잘 견뎌주고 손주와 함께 살아내는 모습이 고마웠다. 포근한 눈은 하루 종일 내렸고, 준기네 웃음소리도 하루 종일 담장을 타고 넘어 동네 가득 나풀거렸다.
백군은 밝은 초희와 만남이 잦아질수록 미소도 찾고, 밝아진 모습으로 자기 역량을 회사에서 더욱 빛내고 안정을 찾아갔다. 덕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지만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돌아오는 봄에 결혼하기로 날짜를 잡고 결혼준비에 한창이었다. 가끔 너무 톡톡 튀는 초희의 모습은 백군을 부담스럽게도 했지만 견딜만한 상황이었다. 차를 몰고 왔을 때도 젊은 여자가 중형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곤 했다. 백군의 가족들은 점차 안정되어 가는 아들의 모습에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백군의 가족들은 혼수 관련한 일도 될 수 있으면 마찰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는 분위기였으므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결혼이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준기는 사장님 차를 전담으로 운전하게 됐지만, 가끔 화물차도 운전하기도 했다. 대형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터라 준기는 회사에서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갔다. 가끔은 동네에서 맥주 좀 얻어먹자고 졸라대는 바람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 평온한 일상을 되찾고 환경이 좋아졌지만, 덕이의 왼쪽 팔과 다리의 마비 증상은 더 이상 호전되지 않았다. 가끔 실의에 빠져있는 덕이를 볼 때마다 준기는 마음이 아팠다. 동네 사람들은 애 낳다가 생긴 병이니 애 하나 더 낳으면 정상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괴변을 늘어놓기도 했다. 준기는 혹하는 마음도 생기긴 했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 더 이상 힘들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물차를 몰고 지방 출장을 가는 날이면, 늘 맥주 몇 병씩을 가지고 가는 습관이 생겼다.
강 씨 할아버지를 소개해 준 김 상사는 버스 운송 사업이 날로 번창해서, 버스 대수도 늘고 사업 규모도 제법 커졌다. 가끔 준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 준기 회사의 모습도 나쁘지 않아 보여 따로 부르진 않았다. ‘언젠가는 같이할 날이 있겠지’ 하는 마음도 늘 마음속에 있었다. 준기가 자주 만나는 친구는 동네에서 다방을 운영하는 태수와 건설현장에서 슬레이트 공사와 외장공사 일을 하는 승화가 있었다. 준기와 친구들은 태수가 운영하는 다방을 아지트 삼아 자주 보곤 했다. 준기가 어려울 때 위로가 된 친구들이다. 승화는 겨울철이라 일이 없어서 다방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는 일도 많았다. 준기는 집이 안정되자 친구들과의 술자리가 늘고 귀가 시간이 늦어지는 날도 많아지고 있었다. 봄이 되자 승화도 일자리가 생기고, 술자리를 할 친구가 없어져 차츰 성실한 준기 모습으로 돌아갔다.
백군과 초희는 봄이 되자, 명동 근처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고, 차를 몰고 부산으로 향했다. 신혼여행지가 부산이었던 것이다. 바닷가를 거니는 동안 초희는 쉴 새 없이 얘기를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이며, 아이는 몇을 갖고 싶냐는 등 잔뜩 흥분된 어투로 백군의 귀를 간지럽혔다. 초희는 또 “나 직장 다녀도 돼요?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집에서 노는 건 좀 그렇잖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종로에 있는 어학원에 영어 강사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순도 씨가 허락해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순도는 “ 생각해 봅시다.”라고 말하고 즉 답을 피했다. 그러나 신혼여행을 마치고, 일을 하겠다고 조르며, 당분간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피임하겠다는 초희와 소소한 잦은 다툼을 하게 됐다. 그럴 때마다 백군은 덕이가 떠올랐다.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도 그냉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봄의 햇살은 만물에 생명을 넣기도 했지만 나른함을 동반하기도 했다. 아지랑이 하늘하늘 피어오르던 날 준기는 작은 트럭을 몰고 가다가 영등포 시장 근처 로터리에서 승용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냈다. 승용차에는 젊고 세련된 여인이 운전하고 있었고 여인은 차에서 내려 이마에 피를 닦으며,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준기는 쌍방 과실 수준인 상황이었는데도, 먼저 죄송하다고 사과를 했다. 순간적으로 준기의 착한 심성이 가해자로 만드는 상황을 만드는 꼴이 되었다. 이렇다 할 항변도 못한 채 경찰서에 가게 됐다. 준기 차에는 습관적으로 가지고 다던 맥주가 운전석 옆에 쓰러져 있었고, 경찰은 술을 마셨냐고 다그쳤다. 준기는 다행히도 술은 마시진 않았다. 그러나,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상황이 자꾸만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 상대방은 운전하다 사고 난 것을 아빠와 남편에게 야단맞기 싫어서 철저하게 피해자 코스프레를 했다. 경찰은 무슨 연유인지 그 여자의 말을 준용했다. 결국 준기는 구치소에 들어가게 됐다. 덕이는 하늘이 무너졌다.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재판을 기다려야 하니 당장 생계가 막막하고 회사에서도 좋은 시각으로 준기를 봐주지 않았다. 변호사도 선임해야 하고 무죄를 입증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덕이는 영을 업고 절뚝거리며 경찰서를 찾았다. 경찰들에게 “에 아빠가 없으면, 우린 살길이 없어요. 제발 선처해 주세요.”라고 하자. 애 업고 절뚝거리는 덕이가 안쓰러워진 경찰들은 피해자와 합의가 우선이니 그쪽에 사정해보라고 했다. 덕이는 피해자의 집을 찾았다. 높은 담을 하고 있는 2층짜리 양옥집이었다. 벨을 누르고 사람이 나오길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자 집안에서 젊은 여인이 나왔다. “무슨 일이죠?” 여인이 묻자, 덕이는 “우리 남편과 사고가 있었던 것 같은데, 보시다시피 제 꼴이 이래서 우리는 그 사람 없으면 살길이 없어요.” “제발, 부탁드리니 서로 합의하고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여인은 덕이가 불쌍했지만,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돌아가세요. 그 사람은 벌 받아야 해요. “라고 말했다. 야멸차게 몰아세우고 획 돌아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말이 되자, 덕이는 영을 업고 준기를 면화하고, 다시 그 여인의 집을 찾았다. 여인은 대문 앞에서 또다시 덕이를 내몰고 있었다. 때마침 퇴근하던 여인의 남편은 이 상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인의 남편은 백군이었던 것이다. ” 덕이 씨!! 어떻게 된 겁니까? “ 덕이도 놀라며 만감이 교차했다. 자기가 버린 남자 앞에 불구의 모습으로 사정하러 와있는 모습은 덕이를 괴롭혔다. 도망가고 싶었다. 발이 떨어지지도 앟았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초희는 덕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순간 자기를 닮았다는 걸 느꼈다. 언젠가 미국에서 남편이 자기를 덕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났다. 덕이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백군을 보자 초희는 화가 더 치밀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백군은 차마 보일 수 없는 눈물을 삼켰다. 초희에게 그만하라는 외마디를 남기고 백군은 덕이를 자기차에 태워 덕이를 집에 데려다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백군은 초의에게 합의해 주고 끝내라고 했다. 초희는 도대체 저 여자가 뭐길래 나에게 이렇게 대하냐며 화를 냈다. 백군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살고 있었지만,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버럭 화를 내게 되었다. 초희는 덕이를 본 이후로 더 각을 세웠다. 덕이의 발검음은 초희를 더욱 화나게 했다. 운명은 또 이렇게 덕이를 멍들게 하고 있었다.
- 회상 -
잘 지내는지
궁금했어요
잘 지내냐고
묻고 싶었죠
모른 채 살고 싶었죠
잘 살거라 믿었어요
왜 나를 떠났는지
왜 지금 이렇게 아픈지
그리웠던 그대가
밉습니다.
그리웠던 그대가
아픕니다.
내 가슴 다시 피로 멍울지게 하는
그대는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