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서
하루가 천년같이 지나갔다. 준기가 구치소에 있는 동안, 덕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렇지만 하나만은 분명했다. 어떻게든 준기를 빼내야 한다는 사실 그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봄은 그렇게 거칠게 지나가고 초여름 날씨처럼 5월의 한낮은 뜨거웠다. 덕이는 초희를 만나러 또다시 길을 나섰다. 초희는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다. 준도의 태도가 초희에게 화를 키우는 꼴이 됐다. 초희도 덕이가 불쌍하긴 했지만, 준도의 마음을 헤집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결국 시간은 흘렀고, 재판을 해야 하는 지경까지 가게 돼서 판결이 날 때까지 준기는 구치소 신세를 면치 못했다. 덕이는 백군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재판을 담당할 검사와 판사가 지정되고 재판일이 잡혔다. 백군은 이일에 더 신경 쓰고 싶지 않았으나 다리를 절던 덕이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초희와의 관계도 더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사태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결국 재판을 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백군은 참을 수가 없었다. 백군은 초희에게 “사람이 왜 그렇게 모집니까?” “따지고 보면, 서로 과실이 있는 건데,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망가뜨리지 못해 안달이 난 거냐고요?” “그리고, 내가 그렇게 부탁까지 했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요?”라고 따져 묻자, 초희는 “몰라서 물어요? 도대체 그 여자는 당신한테 뭐예요. 그 여자 이름으로 나를 불렀던 것처럼 아직도 그렇게 애틋한가요? 나는 그 여자의 대타인가요? 왜 한 번도 내 편을 들지도 않고 그쪽 편만 들고 있냐고요?”라며 화를 내며 돌아섰다. 백 군은 초희를 돌려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응시하며 긴 얘기를 시작했다. 미국에 가게 된 사연,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던 이유, 그 모든 얘기를 초희 앞에서 하나씩 과거를 접듯 털어놨다. 그리고, 덕이와 같은 모습 때문에 만나게 됐지만 초희는 아픈 상처를 치유해 준 유일한 사람이고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라고. 또, 편들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멀쩡하던 사람이 다리를 절고 있는 모습에 알 수 없는 연민이 생겨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챙기게 됐다고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밝고, 명랑하고 착했던 그 심성으로 언제나 과묵하고 재미없는 자신에게 와줘서 고맙고, 그렇게 계속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도 했다. 초희는 어느 정도 마음이 누그러지긴 했으나, 한 번에 모든 걸 없었던 것으로 하긴 어려웠다.
덕이는 변호인을 구할 형편이 못 되기 때문에 검사를 찾아가 호소해보기로 했다. 준기의 딱한 사정을 알고 김 상사는 덕이를 도와서 검사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검사는 사건을 배정받자마자 피의자 측에서 청탁을 하러 온 것으로 오인해서 매우 불쾌해하며 덕이를 동그랗고 작은 등받이 없는 나무 의자에 앉게 했다. 검사는 “ 피해자랑 합의나 잘하시지 나는 왜 찾아왔어요?”라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검사가 퉁명스럽고 무서운 것보다 사무실의 명패를 보고 덕이는 눈물이 났다. 검사 이름이 흔하지 않고 발음하기도 좀 어려운 준기와 덕이의 아들, 지금, 이 순간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덕이의 등에 잠들어 있는 바로 그 영의 이름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명패에는 ‘검사 양 영’이라고 쓰여 있었다. 양 검사는 짜증도 났지만, 애를 업고 다리를 절며 들어선 여인이 앉자마자 울고 있어서 당황하기도 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어차피 조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니 사실 확인 겸 얘기를 듣기로 했다. 덕이는 줄곧 준기만의 잘못이 아니니 선처해 달라고 부탁했다. 양 검사는 ‘그냥 합의만 하면 끝날걸 왜 이렇게 까지 됐지?’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여인을 돌려보내고 양 검사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예정보다 조금 빨리 피해자 진술을 듣고 싶어 수사관에게 연락을 취하도록 지시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덕이의 길은 너무 멀었다.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그렇게 높은 자리에 아들과 같은 이름을 한 사람을 만나고 나니 덕이는 영을 그렇게 키우고 싶었다. 덕이는 영의 손을 잡고 걷다가 업었다가를 반복하며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곳까지 한참을 걸었다.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질 때쯤 까만 승용차 한 대가 덕이 모자 옆에 섰다. 문이 열리고 김 상사가 영을 안아 차에 태우고 “덕이 씨, 얼른 타세요. 그 몸으로 버스는 무리예요.” 사양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너무나 고마웠다. 승용차의 뒷자리는 어릴 적 엄마의 품처럼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차창으로 스치는 꽃비를 보지 못했다. 거리는 꽃이 지고 있었다.
검사의 부름을 받은 초희는 양 검사와 마주했다. 양 검사는 부유하고 세련돼 보이는 초희에게 “어떻게 보면, 양측이 과실이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라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당황한 초희는 “내가 피해자라고요.”라고 외마디 외치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조금 불쾌한 표정으로 다음 질문을 하려고 할 때 순도가 노크를 하고, 초희가 있는 검사실로 들어왔다. 양 검사가 “누구시죠?”라고 묻자, 순도는 초희를 가리키며 “이 사람 남편입니다.”라고 말하며, 초희 옆에 앉아 초희의 손을 잡아 주었다. 당황했던 초희는 순도의 손이 너무나 따뜻하고 고마웠다. 순도는 검사의 의중을 파악하고 수습에 나섰다. 초희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양 검사에게 “저희 집사람이 많이 놀랐던 것 같습니다. 시간도 지났고, 저쪽도 고생할 만큼 한 것 같으니 저희는 이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며, 초희의 눈을 바라보고 눈빛으로 동의를 구했다. 초희도 자기 옆에 와준 순도가 고마웠고 딱딱한 검사 앞에서 대신 나서줘서 너무 고마웠다. 초희도 눈빛으로 동의를 표했다. 검사는 기소를 파기하고 사건을 마무리하도록 돌려보냈다. 소식이 전해지고 준기는 구치소에서 풀려나게 됐다. 덕이와 준기는 백군의 집을 찾아갔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했다. 초희는 이들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백 군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한때 자신의 정혼자를 뺏은 사람이 초라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인사하러 오는 모습이 영 못마땅했다. 찾아온 사람들을 문전박대할 수 없어 일단 집으로 들여서 네 명은 찻잔을 경계로 마주 앉았다. 덕이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미안하고, 고맙습니다.”라고 했고, 아무 말 없는 초희를 대신해 “서로 불찰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 마음 쓰지 마세요. 그리고, 이 사건을 재판까지 가지고 가지 않은 건 우리가 아니고 담당 검사였습니다.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시고 앞으로 잘 사세요.”라고 백군이 말했다. 내색할 순 없지만 백군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초라해지고 몸까지 불구가 된 덕이를 보는 것이 마음 아프다 못해 화가 났다. 초희를 달래고 침착하게 이들을 배웅하고 백군은 초희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잘 대처해 줘서 고맙다고 초희에게 다정하게 얘기했다. 초희는 남편에게 처음으로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고, 고맙기도 했다.
준기는 회사에서 쫓겨날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무죄로 나오긴 했지만, 조사 기간에 차에서 발견된 술병들과 긴 공백 등 회사는 달갑지 않았다. 김 상사는 준기가 다닌 회사 사장을 만나 선처를 호소했지만, 일단 내보내야 한다고 그 사장으로부터 답을 들었다. 대형 면허가 있으면, 당장이라도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준기는 다시 원점이 된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이 화가 났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보기 싫었다. 며칠을 두문불출하며 말을 하지 않았다. 덕이는 준기가 이성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두문불출한 지 닷새가 지날 무렵 건설 현장에서 외장공사를 하던 친구 승화가 찾아왔다. 승화는 준기에게 “네가 다니던 맥주 공장에 세 들어 있는 슬레이트 공장에서 1톤 트럭 운전할 수 있는 운전수를 뽑는데. 내가 현장에서 자주 보던 벽돌도 찍고 하는 회산데 괜찮을 것 같아서 내가 너 소개한다고 했어. 가볼래?”라고 말하자, 말이 끝나자마자 준기는 승화의 손을 덥석 잡고 “고마워, 얼른 가보자. 어디로 가야 해? 누굴 만나야 해?”라고 다그쳐 물었다. 승화는 “오늘은 늦었고, 내일 나랑 가자.” “꼴이 이게 뭐냐? 목욕 좀 다녀오고 쉬고 있어. 내일 올 테니 그때 보자.” 말을 던지고 승화는 영의 볼을 툭 치고 덕이를 바라보며 “제수씨, 걱정 말아요. 잘 될 겁니다. 저 가요.”라고 말하고 저녁 먹고 가라는 말을 듣지도 않고 휙 가버렸다. 덕이는 승화의 뒷모습을 한 참 바라보며 감사의 마음을 보냈다. 모처럼 세 식구는 마음 편히 저녁 식사를 했다. 다음날 승화에 함께 찾아간 벽돌 공장은 준기의 운전 경력 등 됨됨이가 맘에 들었다. 7월부터 출근하기로 하고, 준기는 친구네 다방에서 승화가 만들어 준 기회랑 그동안의 얘기를 친구들과 하며, 마음속 응어리를 털어내듯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뭐라도 사들고 집에 가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다. 다방 운영하는 친구가 눈치를 채고 다방 옆 빵집에서 빵을 한 봉지 사주며 “제수씨 갖다 줘라. 고생 그만 시키고.”라며 히죽거리며 웃었다. 준기는 친구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신바람 난 걸음으로 집에 들어섰을 때, 저녁상을 차려 놓고 상보로 상을 덮은 채 준기를 기다리던 덕이는 어떻게 됐냐는 질문 대신 “배고프죠? 얼른 식사해요.” 늦게 온 이유가 뭔지 잘못된 건 아닌지 궁금했지만, 덕이는 묻지 않았다. 준기는 덕이를 와락 안으며 “먼저 먹지 왜 아직까지 기다렸어요?”라고 말하고 “내가 맛있는 빵 사 왔어요. 같이 먹읍시다.”라며 친구가 사준 빵 봉지를 내밀었다. “와 맛있겠다.” 라며 궁금한 걸 묻지 못했다. 순간 준기는 “미안해, 그동안 걱정 많았지? 앞으로 내가 정말 잘할게. 나, 7월부터 출근하기로 했어.”라며 덕이를 다시 한번 꼭 안았다. 덕이는 날아갈 듯 기뻤다. 식은 밥을 데우려 하자 준기는 괜찮다고 그냥 먹자고 했다. 두 사람은 영과 함께 아들과 이름이 같은 담당 검사 얘기를 하며, 영을 훌륭하게 키우기로 다짐하며, 밤새 이야기 꽃을 피웠다. 덕이는 준기가 사 온 빵 몇 개를 쟁반에 담아 주인집 강 씨 할아버지에게 나눠 드리며, 준기가 다시 취직됐다는 소식도 전했다.
-절망 속에서-
꽃이 피고 지듯
같은 뿌리에서의 윤회는
그들만의 것이지만
비록 한번 피고 지는 꽃이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꽃을 피우지
그리고 우린
다시 필 뿌리를 찾을 거야
그래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