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희망
밀월은 길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돌아오자마자 함께 덕이의 집으로 향했다.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가족만이 아니라, 노심초사 매일 덕이의 집을 확인하던 백군도 와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이성을 잡아둘 수 없었다. 덕이의 오빠는 준기의 멱살을 잡고 여기가 어디라고 그 두꺼운 낯을 들고 오느냐고 소리를 질러 댔다. 준기는 말없이 그들의 화풀이가 끝날 때 아무 말도 몸짓도 하지 않았다. 덕이는 다급하게 ”그 사람 잘못 없어요. 그 손 놔주세요. “라고 말하고 덕이는 더 단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덕이의 오빠는 덕이의 뺨을 떄리려 했다. 그 순간 백 군이 막아섰다. 분을 참지 못하고 있는 덕이의 오빠 옆에서 침착하게 백군은 덕이를 보호하고 나섰다. 순간 준기는 자신의 모습이 또 초라해 짐을 느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 던진 덕이에게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게 정녕 없는 건가?’ 이런 자괴감에 준기가 괴로워하는 순간 덕이는 침착하고 단호하게 ”우리는 이미 초야를 치렀어요. 우린 되돌릴 수 없어요. “ ”제발 우리를 인정해 주세요. 저는 준기 씨와 미래를 함께할 겁니다. “ 덕이의 말은 냉정하고 단호했지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백군의 귀에는 확성기를 틀어놓은 것같이 주변의 모든 소리를 잠재우고 덕이의 소리만 아프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만하세요. 덕이 씨! 도대체 왜 이러세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덕이 씨 이런 사람 아니잖아요. “거의 울부짖는 음성으로 덕이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준기는 덕이의 집 마당에서 강제로 집 밖으로 내몰렸다. 덕이를 혼자 두고 매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그 자리에 또 서있게 되었다. 준기의 심장은 계속해서 우뢰를 만들고 있었고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백군은 이미 한바탕 소동으로 끝날 일이 아님을 알았다. 백군은 ”거짓말 일거라는 확신을 하면서도 덕이에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덕이는 백군을 응시하며 “미안해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떨구진 않았다. 자기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는 덕이가 미웠지만 백군은 덕이가 더 멀어질까 노심초사했다. 이미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백군은 그렇게 간절한 눈으로 덕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초야를 치렀다는 말에 백군 보다 준기가 더 놀랐다. 상황을 마무리하려는 덕이의 모습이 한없이 커 보였다. 밖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준기의 옆을 덕이의 집에서 뛰쳐나온 백군이 준기를 쏘아보며 지나갔다. 준기는 아직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덕이는 엄마에게 간청했다. 덕이의 엄마는 들으려 하지 않았고, 덕이의 오빠는 당장 나가라고 아침부터 호통을 쳐댔다. 이전 같았았으면 겁에 질려있었을 텐데, 덕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호통을 치는 오빠와 엄마 앞에서 곧 나가겠다고 오히려 엄포를 놨다.
백군은 덕이에게 만나자고 연락을 취했다. 덕이도 한 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덕이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의 다방에서 둘은 마주 앉았다. 평소처럼 백군은 모든 매너가 완벽했다. 백군은 자초 지종을 물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게 해달라고 말하면서 답을 듣지 않아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백군은 덕이의 눈을 보고 알아버렸다. 덕이가 무겁게 미안하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 백군은 “덕이 씨 저는 어쩌면 혼자 살지도 모릅니다. 언제부턴지 덕이 씨는 제 일부이자 전부가 됐어요. 힘들게 말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제가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앞뒤가 맞지 않지만, 부디 행복하세요.” “그리고 부탁이 있어요. 먼저 일어나서 뒤돌아 보지 말고 가주세요. 덕이 씨를 남겨두고 갈 수도 없고 보내고 우는 제 모습도 보이기 싫습니다.” 덕이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이내 눈물은 뺨을 타고 흘렀고 울먹이며 미안하단 말을 계속 되뇌었다. 덕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보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다방을 나섰다. 남겨진 백군은 차마 볼 수 없는 덕이의 뒷모습을 안 보려 애썼고, 마지막 모습을 보려 했을 때는 눈물이 번져 이미 그녀의 모습은 흐릿해졌다.
그렇게 결혼이 무산된 가을은 빠르게 겨울을 재촉했고 준기와 덕이는 두 사람의 미래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덕이가 준기의 집에 인사하러 갔을 때는 교양 없어 보이는 누나 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준기의 형이 덕이를 맞이했다. 어수선하고 집안의 분위기는 덕이의 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누나 중 하나가 퉁명스럽게 “뭐 하러 잘 사는 집 아가씨가 이런 가난뱅이 집에 시집오려고 하나?”라고 빈정대듯 물었다. 대답도 나오기 전에 “우리 준기가 잘 생기긴 했지!” “어찌 됐건 우린 뭐 반대 같은 건 없지만 해줄 것도 없어요.”라고 쏘아붙이고 누나들이 자리를 떴다. 준기의 형은 동생들의 말투를 사과하고 가난한 집이라 돕지는 못하지만 동생과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이 상황이 준기의 형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가족들을 소개하고 나니 준기는 더 이상 답답하질 않았다. 그리고 덕이의 집에 가서 축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덕이와의 결혼을 허락받고 싶었다. 준기는 여러 번 덕이의 오빠를 찾아갔으나 덕이 오빠의 마음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덕이는 준기에게 너무 애쓰지 말라며 위로했고, 흰 눈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덮던 날 덕이 엄마는 준기에게 “이보게 그동안 서운했지? 자네가 미워서 그런 건 아니네. 그리고 어렵게 출발하지만, 우리 덕이 많이 사랑해 주고 잘 부탁하네” 라며 준기의 손을 잡아 주었다.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을 두 사람은 덕이 엄마로부터 받았다. 준기와 덕이는 흰 눈과 함께 지나온 아픔의 시간 모든 것을 덮고 사랑의 약속을 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매서운 겨울바람처럼 차가웠다. 두 사람이 시작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 해결되지 않는 것이었다. 덕이의 엄마는 당분간 집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했다. 그렇지만 처가살이란 것의 부담보다 오빠와의 관계 등 준기가 불편해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덕이도 그렇게는 하기 싫었다. 새봄이 오면 초가 살이를 하더라도 준기와 덕이는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 새봄이 오면….
-백군의 테마-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군요
먼저 가세요
나는 차마
당신을 두고 떠날 수 없어요
뒤 돌아보지도 말아 줘요
남겨진 내 모습도
보여줄 수 없어요
눈물로 당신을 보내지만
내 사랑은 여기에 묻어두렵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