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중간지대
"요즘 뭐 하고 지내?"라는 질문은 나를 늘 멈춰 세우곤 했다. 대답은 언제나 단순했다. 학교를 다니고, 가끔 사람들을 만나고, 그렇게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하루가 스쳐간다고 말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작은 망설임이 남았다. 이것이 정말 나의 일상인가.
나는 한 번 꽂힌 음식을 몇 달간 반복해 먹는다. 두부에 빠지면 냉장고를 두부로 채워둔다. 별다른 조리도 하지 않고 생두부만 먹는다. 이렇게 단순한 루틴으로 하루를 채우지만, 약속이 없는 날이면 머릿속의 복잡함이 깊어진다. 창밖이 어둠으로 물들어 있을 때까지 배고픔도 시간의 흐름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책상 앞에 앉아 일상을 파헤치고 개념을 정리한다. 그런 나를 누군가는 엉뚱하다 말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진심으로 나의 일상을 궁금해할 때면, 나는 가장 평범하게 들릴 답을 고른다. 하지만 하루를 채우는 움직임은 단조로운 말들 사이에 갇히지 않는다. 나의 시간은 자각과 깨달음, 그리고 성찰로 가득 차 있다.
그냥 말하면 될 일이지만, 나는 회피 중이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회적 관념 속 번지르르한 대답을 던지는 게 훨씬 쉬운 길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하려 하면, 머릿속에 귀찮다는 목소리가 제일 먼저 울려댔다.
반응들. 그것에 대응해야 하는 나의 말들. 거기서 파생될 또 다른 오해들. 이 모든 것이 겹겹이 엮여 나를 향해 몰려오는 듯한 압박감. 언제나 나는 말하지 않기를 결심했다. 이건 아주 명백한 도피였다. 나는 귀찮음을 핑계 삼아 세상과 마주하는 일을 미루고, 오해와 상처를 피하기 위해 나를 숨기는 방법을 택했다.
눈에 띄지 않고 흐르듯 살아가는 편이 가장 쉬운 생존 방식이었다. 끝까지 회피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아무도 나의 일상과 생각을 몰라도 된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혼자 걸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몇 번의 이상한 시선을 받은 뒤, 이상한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나의 결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훨씬 덜 피곤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세상이라는 게 그리 단순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숨겨도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처음부터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났다는 것을. ‘이상한 나’를 이 '이상한 사회'가 받아들이게 만드는 편이 오히려 안전했다.
그런데
이상함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상함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정상적'이고 '제대로 된 것'은 무엇인가. 대부분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상'은 절대다수가 속해 있는 범위를 뜻한다. 그런데 이 지점이야말로 이상하다. 우리는 살아가며 깨닫는다. 나 자신이 세상의 기준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에게 닥친 상황들, 혹은 내 안의 결들이 완전히 정상적일 수 없음을. 그럴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평균의 범위에 자신을 맞추려 애쓰기 급급해진다.
하지만 평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분포도의 한가운데를 평균이라 부른다. 그 말은 +와 –가 실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와 –는 본질적으로 좋고 나쁨의 대립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호이며, 방향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양극단에 서기를 두려워한다. 한쪽 끝에는 파괴가, 다른 한쪽 끝에는 고립이 기다리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조차도 하나의 해석이다. 좋고 나쁨은 본래 없다. 기호가 의미를 띠는 순간, 이미 해석이 개입된 것이다.
각자의 이상함이 곧 특별함이라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담대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인간은 저마다의 +와 –가 다른 지점에 위치하며, 결국 각기 다른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이상한 존재다. 우리는 정상처럼 보이기를 흉내 낼 수 있을 뿐, 이 세상에 완전한 정상은 없다.
나아가 평균이 반드시 상극(+/–)의 조화로만 형성된다는 믿음도 버려야 한다. +와 +, 혹은 –와 –가 공명하며 새로운 중심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극단만이 중심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동질적인 것들로도 중심은 태어난다.
모든 지점에서의 중간점은 필연적이다. 나는 그 사실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고, 그래서 나 또한 중간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연스러움을 거스르지 않기로 했다. 중심을 잡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나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나는 극단의 한쪽 끝에 서서, 반대편 극단에 서 있는 이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흔든다.
우리 서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각자의 극단에 단단히 서 있자.
중심은 결코, 대립의 중간 지점이 아니다. 균형은 상극의 조화가 아니라, 동일한 극성의 내부에서도 도달할 수 있는 안정된 상태다. 이 중심은 단순한 덧셈이 아니라, 진동이 멈추고 파동이 정렬되며 태어나는 질적 전환의 자리다.
우리는 보통 ‘평균’이란 서로 다른 극(+/-)의 중간이라 믿는다. 그러나 같은 극(+/+, -/-) 안에서도 ‘질적으로 다른 중심’이 탄생한다. 나는 이 현상을 ‘동질 공진평형(同質共振平衡)’이라 부른다. 이 개념은 존재의 상태가 단순한 합이 아니라, 내부 공진의 패턴을 통해 질적 전환을 이룬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같은 성질의 두 요소가 만나 진동하고, 그 진동이 중심으로 수렴하며 파동의 궤도를 바꾸는 새로운 질서를 낳는다. 나는 이 한 단어에, 존재의 진동과 균형 그리고 탄생의 원리를 농축시켰다.
존재의 상태들은 하나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 있다. 예컨대 ‘기쁨’이라는 한 축만 해도 흥분 → 환희 → 평온한 기쁨 → 미묘한 만족 → 무미건조의 연속적 흐름이 있다. 여기서 중심은 두 극의 타협이 아니다. 그것은 동질적 상태 내부에서 진동이 멈추고 파동이 정렬되며 드러나는 고요의 핵이다.
에너지가 과잉된 상태들(+/+)이 만나면 폭발이 아니라 항상성을 띤 안정적 진동이 탄생한다.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상태들(–/–)이 중첩되면 파괴가 아니라 무감각이나 수용의 상태로 전환된다. 슬픔과 분노가 합쳐져 무력감이라는 새로운 파동을 낳듯이, 중심은 언제나 진동이 소멸하는 순간 드러난다.
두 불꽃이 겹쳐 더 큰 화염으로 번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감싸며 항상성의 성화로 정렬되는 것. 두 물결이 만나 폭풍을 일으키기보다, 서로를 상쇄해 완전한 고요의 수면을 드러내는 것. 이는 강도를 절반으로 나눈 결과가 아니라, 파동의 구조가 다시 쓰이며 태어난 새로운 질서다. 이것이 바로 질적 전환의 중심이다.
그리고 이 질적 전환의 원리는 인간 존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이상함’이라고 부르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본질적으로 이상한 것은 없다. 그저 서로 다른 파동들이 세상 속에서 충돌하고, 때로는 겹쳐지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낼 뿐이다.
다름에도 결이 있다. 어떤 다름은 낯설어서 거부되고, 어떤 것은 억눌린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에 더 깊은 불안을 일으킨다. 전자는 이해받지 못한 채 외면되고, 후자는 불안을 부르는 거울이 된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세상은 이상함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왜 타인의 다름을 제한하려 할까. 그 속에는 억눌린 자신의 욕망이 숨어 있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것들을 미루고, 감정을 눌러두며, 사회적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마음 한편에 “나도 이만큼 참고 견디고 있는데…”라는 생각이 스며드는 것이다.
와중에 누군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모습을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묘한 불편함이 일어난다. “나는 눌러두었는데, 왜 저 사람에게는 허락되는가.” 이 감정은 곧잘 도덕의 언어로 위장된다. “옳지 않아. 저것은 이기적이야.” 하지만 결국 이 마음은 “나도 참았으니, 너도 참아달라”는 무언의 외침일 뿐이다.
타인의 자유로움은 억눌린 자신의 욕망을 비춘다. 그러나 이 자유는 단순한 행동의 해방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 안에 잠들어 있던 결들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공간이다. 그 결을 허용하는 순간, 우리는 억눌린 파동을 비로소 풀어낼 수 있다. 중심이란 타인의 시선에 맞춰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진동을 허락하는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제는 말하고 싶다. 그런 당신이어도 괜찮다고. 이 좁은 세상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짧은 삶 속에서, 이제는 조금 더 당신의 이상함을 살아내도 괜찮다고.
당신이 오래도록 숨겨온 그 이상한 아이는 무엇인가?
나는 당신만의 고유한 이상함이 궁금하다. 그리고 언젠가 그 아이가 고개를 내밀 때, 이미 당신은 이 세계의 새로운 중심에 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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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