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의 체온
황혼의 서녘. 바람이 가지를 흔들 때, 한 송이 붉은 장미가 낙하했다. 아직 식지 않은 체온이 공중에 잠시 머물며, ‘집단’이라는 이름의 줄기는 거칠게 흔들렸다. 나는 그 장면 속, 하강하는 장미였다.
현실적 필요라는 명분 아래 기꺼이 줄기에 매달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발적이었기에 책임 또한 온전히 나의 몫이라 믿었다. 그러나 열정은 금세 한계를 넘었고, 붉은 잎은 갈라짐을 시작했다. 줄기는 나를 붙들었고, 나는 더 강하게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강렬한 속박의 관계는 시작됐다.
장미가 피어나기 전, 나는 토양을 확인하는 원예사처럼 집단을 탐사했다. 구성원의 분포, 가치의 뿌리, 그들이 숨은 신념의 결까지 해부했다. 관찰이 통찰로, 통찰이 애정으로 변모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장소와 사람이 준 온기는 일상에 새로운 색을 주입했다. 사랑의 소속감에 심취해, 과도한 헌신의 비애를 외면했다.
현실은 끊임없이 요구치를 높였다. 애착이 깊어질수록 나의 헌신은 당위가 되었고, 과도한 노동은 규칙으로 굳어졌다. 쉼표는 어느새 이기심이라는 딱지를 달았다. 꽃잎이 더 붉어지려면 스스로의 수액을 짜내야 한다는 강박적이 믿음 또한 생겨났다. 피로가 감각을 마비시켰기에, 과부하의 신호는 지워져 나갔다. 무감각 덕분에 한동안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띨 수 있었다.
땅이 장미를 부르는 방식은 언제나 은밀했다. 책임이라는 무거운 이름이 몸속 깊숙이 스며들어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장미가 몸을 낮추며 땅을 향해 기울기 시작한 순간조차, 나는 그것이 더 깊은 사랑인 줄로만 알았다. 줄기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미세하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나의 일부를 덜어 넣었다. 애착은 마취제였다. 덕분에 장미가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을 듣지 못했다.
어느 날, 질문이 번져왔다. 무엇을 위해 빈자리를 나의 몸으로 막아왔는가. 쓰러질 듯 기울어지면서도 멈추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랑이라 불렀던 감정 뒤편에는 ‘소속되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이 자리했다. 끌림은 순식간에 굴레가 된다. 집단은 가치를 비춰주는 거울이었고, 나는 그 거울에 더 선명한 흔적을 남기고자 혈안을 올렸다. 그렇게 남은 것은 거울이 아닌, 장미에 새겨진 혈흔이었다.
결별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줄기가 나를 놓은 걸까, 나의 힘이 풀린 걸까. 서로를 탓할 새도 없이 줄기는 툭 끊겨버렸다. 떨어지는 찰나, 얼룩처럼 남은 체온이 허공을 데웠다. ‘텅 비었다’는 말은 착시였다. 줄기는 가볍게 흔들렸고, 어둠은 그 틈에서 숨을 골랐다. 나는 공중에서 느슨히 회전하며 깨달았다. 이제 이곳을 놓아야 할 때라는 것을. 흙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땅에 닿은 장미는 마지막 붉은 온기를 나눈 뒤, 서서히 토양과 혼합됐다. 갈아 넣은 체력과 마음은 허공에서 소멸된 것이 아니었다. 모든 과정은 변환이다. 장미는 공동체라는 흙으로 스며들어, 씨앗의 영양분이 됐다. 그럼에도 내 안의 공허함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내가 남긴 헌신 위로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는 구조의 광경은 잔인했다. 나는 도려낸 마음보다 무너진 신뢰를 더 오래 매만져야 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쌓아 올린 과로의 밤이 떠올랐다. 허탈감의 실체는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실망감이다. 내가 나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 계산 없는 사랑이 결국 자기 소진으로 귀결됐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비참히 남겨진 나의 마음의 소리였다. 그러나 그 애통함은 동시에 순수했던 진심을 증명했다.
통증은 해부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의미를 띤다. 나는 피로의 지층을 더듬어가며 얻은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한계가 허락되지 않는 환경, 책임을 가장한 착취, 애착을 유발하는 심리적 덫—이 모든 것이 거대한 구조였다. 구조를 알면 틈이 보인다. 어둠을 직시할수록 빛의 결이 더 선명해지듯, 고통의 깊이를 헤아릴수록 희망의 숨결은 넓어졌다. 절망은 누군가에게 작은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존재가 빈자리를 완벽히 채우려 들면, 결국 다시 비워지는 운명을 맞는다. 반대로 흐름 속을 순환하는 존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가지를 떠난 장미가 흙 속에서 씨앗을 품듯, 나 역시 흘러가며 적은 가능성을 묻어둘 뿐이다. 언젠가 누군가 그것을 발견한다면 사라진 줄 알았던 장미는 새로운 생명을 싹 틔울 것이다.
땅속에서 부패하는 장미가 다음 봄의 싹으로 환원된다는 평범한 이치, 그것이면 족하다. 폐허처럼 보이는 자리에 남은 체온을 기록하며, 나는 다시 걷는다. 소진보다 순환, 희생보다 호혜가 작동 원리가 되는 공동체를 상상한다. 여백이 누군가에게 도착지를 내주고, 동시에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러니, 장미는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다. 새로운 방식의 ‘있음’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 선택이 자유의 또 다른 이름임을 깨닫는 순간, 상실은 낭비가 아닌 서곡이 된다. 황혼이 깊어질수록 체온은 짙어지고, 어둠이 짙어질수록 새벽은 더욱 또렷해진다.
나는 이제 그 무엇도 붙들지 않는다. 장미는 피어도 좋고, 시들어도 좋다. 내가 흙으로 스며들든, 허공에 흩어지든 상관없다. 생명은 언제나 그렇게 움직여왔고, 그 흐름은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서 모든 것이 스스로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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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