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비행기는 구름 위를 단호히 가르고 있었네. 창문 너머의 하늘은 허공에 걸린 무대 장치처럼 정지해 있었지. 나는 이미 떠나왔으나, 발 디딜 자리는 여전히 어디에도 없었다네. 여권을 쥔 손은 하나의 선택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을 동시에 쥔 듯했지. 떠남과 도착 사이, 나는 잠시 머물렀으나, 그 순간조차 정체의 욕망 같았다네.
기내는 곧 잠잠해졌지. 나는 창밖보다 무릎 위에만 시선을 고정했네. 벨트는 허리를 단단히 조이고 있었고, 의자는 지나치게 좁아 숨을 깊게 들이쉴 수조차 없었지. 움직이지 못하는 이 답답함 속에서 나는 안전하다는 감각 그리고 동시에 탈출구가 없다는 공포를 삼켰네.
그 둔탁한 숨 막힘은 단순히 비행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네.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더 큰 흐름이 자신을 끌고 간다는 걸 느껴본 적이 있지 않겠나. 헐거운 숨소리와 제자리에 묶여버린 몸. 그 사이에 세계는 이미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순간 말일세. 안도와 억압이 한 몸처럼 겹쳐 오는 그 체험이야말로 지금 내가 겪는 것이었네.
기내방송은 낯선 억양으로 흘러나왔어. 아무리 집중해도 단어는 잡히지 않았지. 그 순간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네. 갑작스레 옆자리에서 종이가 가차 없이 넘어가는 소리가 공기에 스며들었지. 자그마한 움직임은 오히려 방송보다 또렷하게 내 귀에 남았어.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은 허공에 흩어지네. 그러나 자신의 시간을 이어가고 있는 소리는 고립의 무게를 덜어주지. 사람의 손길이 멈추자 다시 낯선 정적만이 주위를 채워버렸어. 나는 할 수 없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네.
유리창 너머 구름이 펼쳐졌을 때, 그것은 장엄하고 멀었네. 나는 여권을 손바닥에 눌러 쥐고 있었지. 작은 책자 하나가 나의 신분을 증명하고, 이 낯선 하늘을 건너게 한다는 사실이 분명 위안이 되긴 했다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주어진 체계에서 빌려온 것이었지. 그 네모난 것이 나의 자리를 보증해 내더군. 그 순간 나는 사회 없이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네. 형식을 잡도록 태어났고 그것이 동시에 구속으로 이어지는 곳. 겸, 이런 게 인간을 지탱하는 것들의 이중성일까.
바퀴가 활주로를 긁으며 기내가 낮게 떨렸네. 멈춤이 주는 안도감은 분명했어. 다만 떨림, 그것은 내가 원해서 내린 장소가 아니었지. 아이가 부모의 손에 이끌리듯, 나는 나의 뜻과 무관한 흐름 속에서 방향을 바꾸고 있었어. 세계의 역사에 따라 결정된 낯선 땅에 옮겨졌다는 현실이 남겨졌네.
곧 문이 열렸어. 연료 냄새와 습한 공기가 한꺼번에 스며들었네. 그것이 환영인지 단순한 통과의식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만 단 하나는 분명했지. 이제부터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네. 바퀴가 굴러간 자국처럼, 이미 지나간 자리를 다시 거슬러 오를 수는 없으니까.
여기 이곳에는 푸른색 간판에 흰 단어들이 높은 빌딩에 겹겹이 매달렸고, 빛은 습기로 탁해진 공기 속에서 번져나가며 희미하게 흔들렸네. 이국의 언어가 부딪혀 흩어지는 소음이 찬란하게 이어졌어.
거처로 들어가기 위해 곧바로 기차역으로 향했네. 높은 천장 덕에 말소리가 메아리처럼 번져왔지. 전광판의 불빛은 끊임없이 깜박이며 사람들을 선로 안쪽으로 몰아세우고 있었어. 줄지은 사람들 사이로 가방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이어졌네.
아낌없이 들여다본 표 위의 활자들은 여전히 낯선 기호로 보였네. 그것은 내가 고른 길을 증명한다기보다, 이미 깔린 레일 위로 나를 태워 보내려는 표식 같았지. 선로는 두 줄기로 곧게 뻗어 있을 뿐이었네. 되돌아가거나 비켜서는 길 따위는 허락하지 않았어. 겸, 영원히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모른 채 발을 옮겨야 하는 것은 정말인지 거짓말 같았다네.
그때 푸른 눈을 가진 남자가 나의 기차표를 보았어. 그의 머리카락은 연갈색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렸고 눈빛은 선명하고도 강렬했지. 그는 신속한 시선으로 내 손끝의 망설임까지 살폈다네. 그러고 난 뒤, 다정히 방향을 가리켜 주었지. 순간 그의 눈빛에서 그대가 지녔던 초월적인 능력이 겹쳐 보였다네.
가방들이 몰려와 내가 밀려날 뻔하자, 그는 팔을 들어 공간을 터주었어. 과장되지도, 꾸며지지도 않은 그 배려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았지. 말 한마디 없는 담백함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나의 고립의 무게를 덜어주었네. 그 무심한 손길이 낯선 땅을 허락하는 듯했으나, 나는 끝내 이방인으로 묻어진다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었어.
겸, 오래된 정류장이 떠올랐네. 우리는 같은 벤치에 앉아 있었지만, 나는 늘 책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지. 그때 그대가 나의 무릎 위로 몸을 기울이며 시선을 가렸던 것을 기억하나. 나는 책장을 펼쳐보려 했으나, 그대는 나의 시선을 새롭게 붙잡고 있었지. 그 눈빛은 마치 가끔은 활자 말고 당신을 보라는 듯했네. 웃어넘겼던 그때의 신호가 이 낯선 곳에 와서야 내게 말을 걸고 있어. 활자를 읽는 대신 세상의 언어를 보라는 침묵. 그것에 대한 대답이 가슴 안에 새겨지고 있다네.
그리고 정류장 밖의 풍경도 익숙했던 기억들과 비슷했네. 정류장 바깥에서는 굵고 가는 소리들이 한꺼번에 부딪히며 흘러갔지. 완강한 대화, 익숙한 호명, 가냘픈 아이의 반항까지 뒤섞여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내 귀에는 붙잡히지는 않았어. 그러나 모든 낯섦은 나를 밀어내는 동시에 붙잡고 있었다네.
그대가 나를 바라보았듯, 이 세계 또한 책 속에서 걸어 나와 그 자체로 눈앞에 서 있더군. 활자와 세계, 그대와 지금의 풍경이 겹쳐 들어오며 나는 비로소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지.
불빛이 희미하게 번져드는 골목. 그것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누런빛이 감도는 건물이 나를 맞이했네. 오래된 듯 삐걱거렸으나 높은 층고 덕에 답답하지 않고 온전히 숨 쉬는 기분이었어. 방 안은 반듯하지 않았네. 벽은 사다리꼴처럼 기울어 있었고, 기둥이 군데군데 튀어나와 매끈한 선을 허락하지 않았어. 그 불규칙이 묘하게 정직하게 다가왔네. 각이 많은 구조는 기쁜 멈춤을 만들더군.
겸, 세상은 늘 반듯한 틀 안에서만 안전을 말해왔지만, 정작 내가 발을 붙이는 자리는 이렇게 삐뚤고 각진 곳이었어. 한쪽 벽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는데, 가벼운 커튼이 높게 드리워져 있었지. 그 천은 빛을 허락하기도, 단절하기도 했어. 걷는 순간 방은 넓게 열렸으나, 닫힌 순간엔 축적된 경험의 방처럼 좁아졌네.
창문을 열자 낯선 온기가 흘러들었어. 바깥에서는 익숙지 않은 말들과 함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소리는 커튼을 타고 잔잔히 이어졌지.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네. 그러나 웃음만으로도 사람들 사이의 결속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그곳에서 나는 침묵 속에 머물렀다네. 말하지 않아도 공기는 흔들리고, 그 속에서 나는 여전히 세계에 닿아 있었어. 문 밖의 웃음. 번지는 방안의 침묵. 나는 그 두 소리가 겹쳐지는 자리에서 친밀한 생각을 기울였다네.
문을 닫고 조명을 껐네. 방 안은 오롯이 고요의 여백으로 가득 찼어. 다만 그것은 더 이상 고립의 벽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았네. 낮 동안 이어진 작은 웃음과 눈빛, 숨김없는 배려들이 이곳에서 울리고 있었지. 나는 오늘의 잔향을 품에 안고 누웠어. 나는 여전히 혼자였으나 동시에 변화무쌍한 향기로 가득 차 있었네. 세계는 그 자체로 펼쳐지고 있었어.
긴 밤과 어둠. 나는 더 이상 암흑한 미래를 지나친 아픔으로 보지 않았어. 오히려 그 안의 풍경을 읽었지. 내일은 여전히 두려웠지만 동시에 나를 이끄는 강렬한 빛으로 다가왔어. 안식의 제공 또한 없는 무정한 수레바퀴. 그 속에서 어둡게 보였던 이방의 활자들이 나를 둘러싼 별자리처럼 하나의 무늬를 이루었어.
세상의 질서는 끝없이 나를 옮겼다네.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야. 그 까닭에 나는 계속 새로워져야만 했어. 겸, 그대 또한 알겠지만, 바퀴는 같은 길을 도는 듯 보이나, 그 위에 서 있는 자는 늘 다른 풍경을 마주한다네. 그 순간 나는 조금씩 다른 내가 되어가고 있었지. 그렇게 나는 내일을 향한 몸을 굴려 보냈네.
선택 없는 배움은 미세하게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해서 굴러가며
우리를 성장시킨다.
눈앞의 체험은
이성의 가림막을 넘어선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