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동해 01화

부활

by 김가희






겸. 오늘 저녁에도 나는 마지막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네. 불빛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내 앞을 무겁게 스쳐 갔지. 발치에서 작은 몸짓이 꿈틀거리자, 나는 본능적으로 끈을 움켜쥐었네.


두려움은 나를 앞으로 밀지 않았어. 오히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자리에 있던 아이의 작은 온기가 나를 붙들었지. 그 순간 내가 껴안고 있던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부서진 자리에서도 여전히 나를 살게 하는 감정, 살아 있음 그 자체였다는 것을 알았다네.




그러던 찰나, 뒤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어.


- 저 아이는 이름까지도 이미 품고 있는 듯하네. 쿠키라 불러도 어울리지 않겠는가.

- 발걸음은 아이의 장난스러운 미소 같아, 그 또한 귀엽지 않은가.


낯선 말 몇 마디에, 나는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네. 오래 닫아 두었던 마음이 그 짧은 순간 스스로 문을 열어버린 것이야. 뒤돌아본 곳에는 두 여인이 서 있었네. 한 사람은 단정한 머리칼에 어두운 옷차림, 단단한 기운으로 곁을 지켜내려는 듯했지. 다른 이는 붉은 기운이 오른 얼굴에 가벼운 웃음과 애교를 흘려보내고 있었네. 서로 다른 계절 같았으나 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지.



강한 기운의 여인은 몸을 낮춰 나의 아이를 들여다보았고, 취기가 오른 여인은 연신 감탄하며 종을 물었네. 나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지. 여러 핏줄이 어울려 난 아이랍니다. 그러자 그녀들이 반가운 듯 웃으며 몇 살이냐고 물었어. 나는 자연스럽게 한 살이라 답했네.


짧은 문장이 공기를 건너가는 동안, 나는 낯선 이들과 온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꼈네. 그 온기는 오래 머무르지 않았지만, 단단하게 닫아 두었던 벽을 흔들어 놓았지. 세상을 향해 닫혀 있던 창이 잠시 열리며 바람이 스며들었네.


그 순간 세상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등을 돌리고 있었음을 알았네. 어쩌면 세상은 처음부터 같은 자리에 있었고, 이제야 스스로 다른 각도를 바라보게 된 것인지도 모르네.




그간 나는 불빛에 매달려 긴장했지만, 사람들은 이미 곁에서 은근히 나를 감싸고 있었던 거야. 그들의 시선과 웃음이 아이에게 머물렀고, 그 물결은 주저 없이 나의 가슴을 요동시키며 나를 새로운 자리로 이끌었네. 그것은 붙잡기 어려운 감정이 아니라 명확히 지금을 일으키는 울림이었다네.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깨달았지. 그것은 스쳐간 대화가 아니라, 삶이 내게 직접 건네준 신호였음을 말일세. 우리는 말이 아닌 무언가를 나누었고, 그 순간에 깃든 생명의 흔들림은 나를 더 이상 뒤로 물러서게 두지 않았네.


낯선 만남은 언제나 생각을 남겼지. 그것은 바람처럼 지나가는 듯 보이지만 오래 굳어 있던 마음에 금을 냈어. 그 순간을 통해 나는 확실히 알았네. 존재는 홀로 서 있을 때보다 타인의 눈빛과 웃음이 닿을 때 더 깊이 흔들린다는 것을.


우리는 성 안에 갇혀 안전하다고 믿지만, 실은 낯선 목소리 하나에도 쉽게 문을 열고 만다네. 그리고 그 문틈으로 스며드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뜻밖의 따스함이지.




겸. 나는 오래도록 한 곳에 머물지 못한 사람이었네. 집은 잠시 빌린 막간 같았고, 해가 두어 번 바뀌면 어김없이 주소를 옮겨야 했어. 학교도 다르지 않았네. 익숙해지기도 전에 떠나야 했고, 동료의 얼굴을 기억하기도 전에 이름을 지워야 했지.


반복은 나를 자주 흔들어 놓았지만 돌아볼 수 없었기에 대신 스쳐 지나가는 것을 더 세심히 바라보게 되었네. 낯선 길 위의 돌, 처음 스친 눈빛, 하루의 빛 같은 것들. 흔들림은 끝내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네. 넘어짐 끝에 남은 것은 상처가 아닌 어디서든 새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이었어.


머무르지 못했던 삶은 나를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았네. 오히려 작은 순간들을 오래 붙들게 했고, 그 조각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지.




나에게 현재라는 시간은 늘 모래처럼 흩어졌지만, 그 빈자리 덕분에 작은 순간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네. 막연한 두려움은 그림자처럼 따랐지만 그 사이로 스며든 장면들이 나를 붙들어주곤 했어. 미래는 안갯속에 가려 있고 과거는 흩어져도, 지금 이 순간만은 손 안의 돌처럼 강하게 붙들 수 있다네.


그래서 나는 변화에도 책을 놓지 않았어. 집과 학교는 바뀌었고 사람들도 달라졌지만, 책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네. 가방 속 책은 나의 가장 확실한 의식이자 거처였어. 낯선 방에 들어서 종이를 펼치는 순간, 나는 비로소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듯한 안도감을 느꼈지. 글자는 주어진 마지막 집이었고, 어떤 변덕에도 유지하고 싶은 내 유일한 거처였네.




나는 주로 인문학 서적을 붙들었어.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단순히 읽고 넘기지 않고 한 줄을 어떻게 현실에 심을 수 있을지 곱씹었지. 교실의 소란 속에서도, 기차 창가의 바람 속에서도, 이사 온 첫날의 낯선 방 모서리에서도, 책장은 언제나 대화를 열어주었네. 그것은 세상의 누구보다 오래 나를 붙잡는 시선이었고, 달아나려 해도 놓아주지 않는 그림자였지.


이동이 거듭될수록 나는 책과 함께 다른 나로 거듭났네. 어제의 나를 벗겨내고 오늘의 나를 맞이하는 일은, 마치 새 물이 흘러들 듯 자연스레 이어졌지. 그래서 몇 해 전의 나는 불안에 시선을 빼앗겼지만, 지금의 나는 눈앞의 길을 스스로 열며 하루를 생생히 살아가고 있다네.



겸. 돌이켜보면 나는 끝없이 무언가를 붙잡으려 한 사람이었네. 집을 옮길 때마다, 익숙한 얼굴을 잃을 때마다, 그 빈자리를 다른 나로 채우려 했지. 그러나 지나간 것은 애초부터 붙잡을 수 없는 것이었어. 그 허전함 속에서야 나는 지금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었네.


상실은 나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다시 나를 숨 쉬게 했다네. 나는 잃음 속에서 자유를 배웠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내 손에 남은 유일한 선물임을 알았지.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으리. 되돌릴 수 없음 속에서, 오늘을 정면으로 안아드리리. 지금이야말로 나의 집이고, 나의 뿌리이네.


이 작은 글이 앞으로 또 다른 나를 조명할 것이야.

아직 보이지 않는 길 어딘가에서 씨앗이 싹트고 있다네.

어쩌면 지금 문장을 쓰는 까닭도 삶의 선물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일까 싶네.





평온스러운 상실은

붙잡지 못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아쉬움은 비워진 자리를 더 깊은 현재로 채우며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상실은 살아가야만 한다는 집요한 언어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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