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동해 04화

서열

열둘

by 김가희




나는 누구의 언어로 나를 정의해 왔던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편견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왔던가. 겸. 나는 틈만 나면 담을 넘어 도망치곤 했지. 어깨를 스치는 바람을 타고 교문 너머로 달려 나갔네. 거친 모래는 곧바로 나를 맞이했어. 아이들과 어울려 공을 차다 보면 종아리는 금세 까지고 피가 맺혔지. 나는 그것을 훈장처럼 여겼어. 그것은 내 존재가 흔드는 작은 파문이었다네.


주변의 시선은 언제나 나를 낯설게 재단하더군. 어른들은 흰 피부에 검고 풍성한 반곱슬 머리칼을 가진 내가, 곱상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거친 행동을 한다고 수군거렸지. 또래에 비해 키와 덩치는 작았으나 눈빛에서는 알 수 없는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말하곤 했다네. 그들은 두려움과 호기심 사이에서 머뭇거렸어. 작은 코와 체리를 베어문 듯한 입술은 또다시 나를 주목하게 만들었고, 나는 언제나 의도치 않게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가 되었지.


그들은 내가 어떤 눈빛을 가졌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끊임없이 설명했으나, 정작 나는 그 언어를 실감하지 못하였다네. 그들의 언어는 마치 따분하게 줄지어 선 책상의 배열과 다를 바가 없었어. 그 질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창문을 깨부수고 너머의 운동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만이 나를 이끌었다네.




새롭게 오게 된 이 도시의 책상은 조원끼리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게 서로를 향해있었어. 교실 앞 누군가의 가르침을 일방적으로 못 박지 않았지. 그 자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 해 주었네. 아이들은 책상 위에서 연필을 굴리며 웃음을 주고받았어. 그 안에서 우리는 이해의 속삭임을 먼저 따랐네. 나에게는 그것이야 말로 우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명체의 고귀한 필요로 다가왔어.


달마다 서로 다른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었네. 언어는 각기 다른 강줄기처럼 흘러왔고, 억양은 나를 타지의 바람처럼 스쳐 갔네. 그러나 그 차이는 오래 버티지 못하였어. 웃음이 먼저 튀어 오른 뒤 장난이 금세 따라붙었다네. 공책마다 다른 글씨가 가득했으나, 틀린 답보다 크게 남은 건 아이들의 웃음소리였어. 날마다 바뀌는 표정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생동하는 소란이었지. 그 안에서 나는 배움이 숨 쉬고 있음을 보았다네.


활기찬 이 학교는 모든 무기력함을 생략했네. 우린 태양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순수한 몸짓을 이어갔지. 두 팔과 다리를 움직이기 바쁜 나머지, 산수를 위해 골머리를 쌓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덧샘은 공놀이로, 문법 수업은 연극으로 변신하곤 했네. 교실은 겉으로는 질서를 흉내 내었으나, 실제는 언제나 다른 장면으로 흘러가더군. 그 순간 나는, 언젠가 규칙은 다시 나를 붙잡으려 하겠지만, 나는 이 자유를 끝내 쫓을 것이라 다짐했네.



겸. 그러니까 나는 그저 내가 열망하는 것들만 하고 살겠다 다짐했다네.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는 꾸짖음이 돌아올 것도 알고 있었지. 누군가에게는 파렴치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 그 역시도 부정하지 않았네. 그러나 이 말은 세상에 던지는 비난이 아니라 내 안에서 흘러나온 고백일 뿐이었어. 나는 그것을 멈출 수 없었지.


그저 그렇게 먹고살 수 있기에 허락된 사치라는 것을 부정하진 않겠네. 그럼에도 강요받아 만들어진 운명이란 대개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네. 사람들은 현실이라는 무게를 정직하게 보려 애쓰다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곤 하지. 그 끝에 남는 것은 환상뿐이야—사회에 자신을 팔아 얻은, 파괴적인 행복 말일세. 나는 현실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 자신을 살아냈네.




나는 이름이 먼저 불린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 늘 누군가를 앞에 세운 뒤, 그 뒤로는 번호처럼 줄을 세우는 이 세상의 가장 뒷자리에서, 나는 그 장면을 바라보았네. 앞으로 호명된 이들이 아주 잠시의 박수를 받는 동안, 나의 마음이 어디에 서 있는가를 살펴보았네.


남들이 목숨처럼 붙드는 순서와 칸에 속하지 못하였고, 그 바깥에서도 마음은 방황했네. 그래서 다른 결심을 했던 것이야. 현실이 따라주지 않을 땐 정신을 먼저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마음이 제 호흡을 되찾자, 세상이 만든 줄은 더 이상 내 삶의 기준이 되지 않았지.


사람들은 늘 위아래를 나누고, 그 줄의 어디쯤 서 있는지를 말하길 좋아하지. 세상에는 안에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네. 바깥에 서 있던 이의 자유로움. 순서 속 불린 이름을 잃을까 두려움에 묶인 이들. 결국 행복은 그 줄을 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느냐의 문제였어. 그러니 현실의 기준을 핑계 삼아 마음까지 내어주는 건 변명이자 굴복일 뿐이라네. 나는 그것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지.


삶이란, 삶이란 말일세, 오직 두 눈에 담긴 것일 뿐이야. 나의 두 눈은 나의 마음에 무엇이 깃들어 있는가를 증명해 주는 알리바이일 뿐이지. 눈동자 속에 비친 것은 늘 나 자신이었네.



나는 매일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갔었다네.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서열표가 함께 들어 있었지. 뚜껑을 여는 순간, 반짝이는 반찬이 있는 도시락은 부러움의 시선을 모았고, 소박한 밥만 담긴 도시락은 곧잘 동정의 대상으로 흘러갔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도시락이 이름으로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았지.


그래서 구태여 도시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다네. 자신의 고통을 유일한 삶의 표식으로 삼는 것만큼 절망스러운 일은 없으니까. 나는 그들의 저울에 내 도시락을 올려놓고 싶지 않네. 기울어질 수 없는 저울. 사람들은 그것을 기울게 만들고자 하지. 조롱을 얹어 무겁게 만들고, 동정을 보태어 가볍게 만들며, 저울이 움직이는 듯 착각을 하곤 해. 하지만 진짜 무게란 저울 위에 드러나지 않는 법이네.




나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네. 그 누구도 이 점화를 막을 수 없었어. 이것은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었네. 이것만이 존재를 지탱하는 근원이라는 것을 확신했지. 나는 바깥에서 남의 기준이 아니라 내 안의 힘으로 살아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네. 그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저울 위에서 서로를 재고 있더군.


불은 나를 새로운 시험대에 올려놓았고, 나는 그 시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지. 오히려 불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남의 그림자 속에 머물렀을 것이야.


나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였다네. 나만의 것을 붙잡는 순간, 세상이 정해준 기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어. 가슴속에 차오르는 것들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나는 내 공간을 세웠지. 내가 만든 틀, 내가 세운 자리. 그 자리가 곧 나였고, 그곳에서 비로소 창조를 시작할 수 있었네.


나는 그 저울의 현혹을 부숴버리고, 나의 무대 위에서 살 것을 다짐했어. 낡아버린 저울에 묶여 있지 않았고, 더 이상 줄 끝에서 순서를 기다리지도 않았네. 살아있다는 건, 내가 선택한 자리의 무게를 지키는 일이지 않겠나.



나는 힘차게 활을 들어 올렸어. 손끝에 닿은 이 가는 나무가 어찌 단순한 도구일 수 있겠는가. 공기조차 숨을 고르는 순간, 나는 현 위로 첫 마법을 그었네. 소리는 질서와 규율을 거부하는 듯 삐걱이며 튀어나왔어. 나는 삶과 죽음이 맞닿는 문턱에 서 있는 듯하였지. 그러나 나는 결코 악보의 충실한 종이 되려 하지 않았네. 활은 검처럼 휘둘러졌고, 소리는 춤이 되어 내 몸을 끌어당겼지. 나는 사회를 벗어난 채, 죽음의 왈츠 속으로 스스로를 던지고 있던 것일세.


생상의 <Danse macabre 죽음의 무도>. 이는 허무의 장송곡이 아니었다네. 죽음은 늘 끝이라 배웠건만, 새벽을 기다리는 무덤의 춤 속에서 나는 오히려 생을 느꼈어. 이 음악은 끝을 향한 길에서 새로이 춤을 가르쳐 주었네. 질주하는 리듬의 혼돈. 그 속에서 나는 자유의 형상을 목격하였지. 죽음이 망자를 불러 춤추게 하듯, 나 또한 억눌린 자아를 무덤에서 불러내고 있었던 것이네. 활을 긋는 순간은 나를 쓰는 문장으로 변주되고 음악은 곧 언어가 되었다네. 나는 이 밤, 소리 속에서 내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던 걸세.




정오. 열두 번의 종소리가 울리며 맑은 햇빛이 쏟아졌네. 방금 전까지 죽음과 춤추던 내가 순식간에 교실로 불려 온 기분이었지. 책상 위의 성적표가 다시금 나를 맞이했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위대한 자아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누구의 언어로 정의되어 왔던가. 어른들의 평가, 동료들의 수군거림, 종의 위의 숫자들. 그 언어 속에서 사람들을 살아가고 있었네. 그러나 그 세계에서 우리는 더 모호해졌어. 정작 내 안에서 끓어오르던 것은 다른 것이었네. 나를 찾아야 하네. 스스로를 다시 말하고 싶은 욕망, 나만의 문장을 쓰고 싶은 충동 말일세.



성적표는 언제나 냉혹했지. 한 줄의 숫자와 등수가 나의 자리를 규정했다네. 나는 이름이 아니라 번호가 되었고, 성취라는 잣대 위에 올려진 피조물이었지. 세상은 그것을 공정이라 불렀지만, 나는 그 차가운 규율 속에서 조금도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했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선언했네. 그들의 언어를 버리고, 마음의 표현으로 나를 다시 세우리라. 창조, 그것이 내 무기요 내 무대일세. 사회는 성적표를 내밀며 나를 규정하겠지만, 나는 그 글자에 갇히지 않겠네. 나는 필히, 죽음과 함께 살아남을 것이라네.





강요된 질서는 쌓여 진심을 가두고,

서열은 우리를 공허로 이끈다.

생의 무게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게 된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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