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이음
세상은 다양성을 배척했다. 어린 존재는 빛의 무늬를 품고 태어났지만, 거리의 시선은 그 무늬를 불순물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이름표로 아이를 요약하고, 요약 위에 안도감을 세웠다. 정의는 편리하되 잔인했다. 편리함은 복잡한 아이의 심장을 도려냈고, 삭제된 자리를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잔혹했다. 그럼에도 어린 존재는 빛을 믿었고, 이해받을 날을 기다렸다. 희망은 눈부셨으나, 세상은 고개를 돌렸다.
거듭된 왜곡 끝에 결심했다. “세상이 하나의 틀만을 원한다면, 가장 균형 잡힌 조각으로 세상에 응답하겠다.” 대리석으로 나를 빚었다. 황금비율로 계산된 어깨와 팔, 흠 하나 없는 윤곽은 보는 이에게 안도감을 주었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경외의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 환호는 인정을 앞세운 감시였다. 찬탄의 시선 아래, 돌로 굳은 나는 짧은 호흡을 버겁게 내뱉었다. 움직일 수 없는 완벽은 족쇄다. 나는 세상을 속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석관에 봉인한 것이었다.
호평이 쌓일수록 공허는 깊어졌다. 존경은 귀를 간질였으나 가슴에 닿지 못했다. 만남은 늘 순조로웠고, 작별도 깔끔했다. 그 안에서 울려야 할 다성부(多聲部)는 언제나 독창으로 바뀌어 있었다. 다성부가 없는 음악은 시끄럽고, 동시에 공허하다. 밤이 오면 대리석 속, 조각의 깊숙한 심부에서 이름 모를 울음이 번졌다. “무엇이 빠졌는가.” 나는 깨닫지 못한 질문을 반복했다. 질문은 메아리만 남긴 채 허공을 맴돌았다.
그러다 어느 날, 창문 틈으로 한 마리 나비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허공에 그리는 궤적은 제멋대로였고, 날갯짓마다 흩날리던 가벼운 비늘은 조각 위를 스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떨쳐 내고 싶었다. 나비가 다시 공중으로 솟구치자, 불편함과 설명되지 않는 끌림이 동시에 몰려왔다. 작은 형체가 시야를 맴도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고개를 돌렸지만, 날갯짓마다 마치 “네가 밀어낸 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무언의 선언이 맴돌았다.
나비는 계절이 한 바퀴 도는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애써 무시했으나, 돌아보면 언제나 가까운 공기 속에 그 떨림이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미 손끝과 걸음에서 나비 같은 가벼움이 배어 있음을 깨달았다. 날개 대신 몸짓이, 울음 대신 숨결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나비가 내 안의 순수의 잔여였음 깨달았다. 너무나 부드러웠고, 너무나 생기 있었다. 무엇보다 철저히 눌러 두었던 어린 자아와의 첫 대면이었다.
열세 달. 그 시간을 거쳐 나는 나의 나비를 인정했다. 나비는 도망치지 않았고, 나의 호흡에 맞춰 날갯짓을 거듭했다. 조용히 손을 내렸다. 그 순간 매끈했던 조각 표면에 가느다란 균열이 일었다. 그 틈새로 부드러운 빛과 따뜻한 기류가 왕복했고, 흐름 속에서 처음 듣는 낯선—그러나 분명 나의—맥박이 또렷이 울렸다.
확장된 틈으로, 언어 이전의 진동이 스며들었다. 인간은 형체 없는 아기의 울음으로 목마름을 알아채듯, 설명 없는 떨림으로 서로를 감지한다. 떨림은 문법도, 철학도 넘어선다. 피부 사이를 떠도는 미세한 전류, 시선의 미분값, 숨이 멈칫하는 간격. 그것이 처음의 언어이자, 마지막 약속이다.
그제야 나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느끼고 있었다. 다만 단단한 대리석 표면이 주파수를 왜곡해 신호를 흐렸을 뿐이다. 조각 이면의 얼굴은 서툴렀지만 투명했고, 투명함은 의미 없이도 공명했다. 공명 앞에서는 추측도 해석도 무용지물이었다.
내가 경계해야 했던 것은 타인의 오해가 아닌 스스로의 폐쇄였다. “인간은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논리적 선언이, 사실은 개인의 오만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가능성을 믿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는 계산은 정확했지만 잔혹했다. 걸어 잠근 문은 나의 영혼을 말렸다.
나는 실험처럼 가면을 내려놓고 거리로 걸어 나갔다. 첫 발걸음은 낯설었지만, 발바닥은 도시의 맥박과 박자를 맞추었다. 모퉁이마다 마주친 사람들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고, 곧 미소로 응답했다. 설명하지 않았지만, 따뜻한 기류가 손끝에 닿았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본다”의 실체였다. 존재는 증명보다 빠르게 전달된다. 말로 묘사할 수 없는 투명한 파동이, 언어보다 먼저 관계를 짓는다. 순간, 나는 오래된 희망이 아직 숨 쉬고 있음을 느꼈다.
시야를 집단의 풍경으로 확장했다. 사회를 움직이는 무수한 가면들이 시소처럼 서로를 눌러왔다는 사실이 보였다. 가면이 가면을 판단하고, 판단이 오해를 재생산하는 고리가 도시를 뒤덮었다. 그러나 동시에, 가면 아래 무수한 떨림들이 번개처럼 오가고 있었다. 연결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의식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불투명한 층을 걷어내는 것이다. 투명함이 만날 때, 이해는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해진다. 충분한 이해는 증오를 녹이고, 녹아내린 자리에 길을 놓는다. 그 길의 이름은, 희망이다.
희망은 거창한 의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가면의 끈을 한 칸 느슨하게 풀어주는 작은 용기에서 출발한다. 틈새로 흘러나온 진동은, 맞은편 심장의 떨림과 맞부딪쳐 화음을 이룬다. 화음은 논쟁보다 빨리 공존의 방향을 제시한다. 그 방향은 언제나 ‘함께’를 가리키며, 함께 속에서 ‘각자’가 더욱 다채로워진다. 하나이면서 여럿이라는 역설은, 가면을 포기한 이들에게 허락된 축복이다. 우리는 서로를 다 알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다는 사실로 이미 충분하다. 느끼는 존재들은 언어의 벽을 넘어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가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나비는, 한동안 내 안을 선회하다가 마침내 심장 가까이 내려앉았다. 날개 끝의 떨림이 틈새를 넓혀 갈수록, 밀폐됐던 공기가 빠져나가고 새로운 호흡이 스며들었다. 나는 느꼈다. 가면이 갈라진 이유도, 나비가 맴돌던 이유도—서로가 서로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마지막 한 조각은 어리고 순수한 나비였다. 그 조각이 몸속 빈칸에 포개지자, '이름으로 분류된 나'와 '언어로 깎여 만든 나'가 모두 덧칠 없이 맞물렸다. 설명할 수 없는 ‘나’가 완성되자, 완벽을 흉내 내던 틀은 저절로 해체되었다.
우리는 모두 나비를 품고 있다. 아직 몸으로 귀속되지 못한 작은 날갯짓 하나가, 각자의 궤도를 따라 돌며 때를 기다린다. 그 떨림이 스며드는 순간, 개인의 경계는 미세하게 겹쳐지고—나비의 궤적처럼 예측할 수 없지만 정확한 방향으로—우리는 결국 하나임을 기억해 낸다.
당신의 나비는 무엇인가?
.
.
.
.
.
마지막 조각을 찾아, 다시 탄생하라.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