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을 녹여 흐르다
옳음은 오래도록 나를 지배해 온 선언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존재해야만 한다'는 문장을 마음 안에 새겼고, 그 문장은 곧 단단한 외피로 굳어졌다. 한때 그것이 나의 방패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는다. '옮음'은 나를 보호했고, 무익한 상처를 대신 맞아 주었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보호막이 방패를 넘어 갑옷으로 확장되며 시작됐다. 단단함은 경직이 되었고, 경직은 흐름을 끊었다. 흐르는 세상 속에서, 나는 홀로 굳어져 갔다. 그렇게 밀려난 자리엔 피로만이 고였다.
갑옷의 핵심 기능은 경계다. 경계가 선명할수록 위험은 통제된다. 나는 ‘나다움’이라는 벽돌을 차곡히 쌓아 예측불가한 침입을 차단했다. 그러나 돌발성 없는 세계는 살아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삶은 예외와 변수로 구성된다. 변수를 봉쇄하면 정적만이 남고, 그 정적은 이내 무감각으로 부패한다. 자극이 차단된 공간에서 감각기관은 놀라울 만큼 빨리 녹슨다. 둔해진 피부는 상처를 늦게 감지하고, 회복을 더디게 만든다. 방어가 두꺼워질수록 생명 활동은 둔화된다.
우리가 갑옷을 고집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상처를 두려워하는 공포, 흔들림을 수치로 여기는 공포. 두려움이 만든 규정은 “나는 이런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강박을 낳는다. 강박은 자존심을 흉내 내지만, 실은 취약성을 부정하는 위장술이다. 부정된 취약성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시야를 가린다. 결국 나는 나에게서 가장 인간적인 부드러움을 지워 버리고 말았다. 곡선의 살에 직선을 들이밀면, 표면은 반짝여도 속살에 균열이 난다. 타고난 유연성을 억압한 대가는 내부의 붕괴다.
생각해 보라. 인간의 몸에는 직선이 없다. 팔꿈치도, 눈꼬리도, 심장의 박동도 모두 곡선으로 움직인다. 곡선은 충격을 흘려보내고 긴장을 분산한다. 세상 또한 곡선으로 흐른다. 계절은 원을 그리며 돌고, 강물은 굽이치며 바다로 간다. 그 흐름과 조우하려면 나 역시 곡선의 생리를 회복해야 한다. 금속판 위에 덧댄 규정은 곡선의 유연성을 질식시킨다. 유연성을 잃은 존재는 세계와 마찰을 일으키며 결국 부러진다.
갑옷이 한때 유효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특정 국면에서 단단함은 생존 전략이 된다. 하지만 전략은 상황 속에서만 빛난다.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이를 고수하면, 그것은 이내 족쇄로 돌변한다. 문제는 대부분 사람이 족쇄를 전략으로 착각한 채 살아간다는 점이다. ‘예전에 나를 살린 방식이니까, 앞으로도 나를 살릴 것’이라는 익숙함은 정당성을 가장한다. 그 방식이 살린 것은 과거의 ‘한 순간’이지, 현재의 ‘흐름’이 아니다.
인간은 살갗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세계를 온전히 경험한다. 살은 상처받지만, 상처는 회복을 전제로 한다. 회복은 변화를 불러오고, 변화는 생존을 가능케 한다. 살을 드러내고 흐름 속으로 돌아가는 일, 그것이 오히려 생존 확률을 높인다. 시초부터 몸의 곡선은 변화를 품고 유연하게 반응하도록 빚어졌다. 반면, 금속은 흐르지 않는다. 상처 대신 부식이 진행되고, 재생은 허락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덮은 단단함이 우리의 삶을 멈추게 한다.
그러므로 규정은 필요하되, 유동 속에 놓여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는 문장을 해체하라는 말이 아니다. 대신 이렇게 묻기를 권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 있어야 세계와 맞물릴까?”
이 질문은 규정을 잠정적 상태로 낮춘다. 잠정성 속에서 규정은 도구로 기능한다. 도구는 필요할 때 쥐고, 상황이 변하면 내려놓아야 한다. 이를 거부하는 순간, 도구는 족쇄로 뒤바뀐다.
갑옷을 풀어내는 과정은 두렵다. 금속이 벗겨지는 자리에 바람과 햇살이 직격 한다. 낯설고 따가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통증은 감각의 귀환을 알리는 신호다. 감각이 살아나는 순간, 우리는 다시 흐름 속으로 투입된다. 상처는 불가피하지만, 그 뒤에는 언제나 재생이 따라온다. 이 순환의 경험이 곧 인간다움의 증표다. 살은 곡선을 따라 흔들리고, 흔들림은 흐름에 착지한다. 흐름과 조우한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가벼워진다.
이제 다시 자문하라.
“지금 나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가?”
그 정의가 곡선이라면 살은 부드럽게 숨 쉬지만, 직선이라면 서늘한 쇳내가 몸 안에 스밀 것이다. 우리는 태초부터 직선 없는 몸으로 내려왔다. 그러니 본능으로 돌아가라. 굽이치는 상처와 재생의 리듬을 받아들여, 다시 삶의 자리를 찾아라. 유연성, 그것만이 얼어붙은 당신의 시간을 녹여 미래의 흐름을 깨우는 불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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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은 곡선을 허용할 때 시작된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