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

사라진 존재의 초상

by 김가희


끝내 자신을 직면하지 못한 인간. 그는 도망자다.


도망자는 선택, 감정, 말, 침묵—그 모든 것의 출처를 앎에도, 끝내 ‘자기 것’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을 품는 순간, 자신의 세계가 무너질까 두려워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친다. 그는 타인을 이용한다. 감정의 저장소로, 책임의 수신처로, 고통의 반사면으로. 모른 척하지만, 그는 전부 알고 있다. 다만 감정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기에, 모든 것을 묵인하고 그 위에 정당화 가능한 논리를 세운다.


슬픔은 타인이 과하게 반응해서 생긴 것이라 말하고, 분노는 상황이 자신을 몰아붙인 탓이라고 정리하며, 침묵은 어쩔 수 없는 환경이 강요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 모든 언어는 자기 방어이자 도피다. 그는 말없이 감정을 억누른다. 설명을 거두고, 판단을 유보하며, 분위기를 흐리는 방식으로—책임은 전가되며, 주어는 남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자신은 그저 휘말렸을 뿐이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했고, 악의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도망자는 언제나 자기 이야기의 끝을 타인의 탓으로 마감한다. 자신은 애썼고, 상대는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말하며, 자신이 감정의 중심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줄곧 빠져나간다. 도망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 그는 지능적으로 회피하며, 자신이 만든 결과들을 타인의 과잉된 감정이나 오해, 혹은 허약함의 문제로 바꿔치기한다. 늘 그 안에서 자신을 구조한다. 최선을 다했으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되뇐다.


그는 ‘미안하다 ‘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자신이 가해자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심판의 자리에 서기를 거부한다. 대신 시간이 흐르게 두거나, 금전이나 선물, 혹은 가벼운 농담과 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봉합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회피성 이탈이다.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사실상 자신을 감추기 위한 도피처에 가깝다. 관계를 완결 짓지 못한 채 빠져나가는 방식, 그것이 도망자의 서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행동하지만, 무게는 고스란히 내면에 각인된다.


역설적으로 동시에 연민을 원한다. 내면의 미숙함, 그 불안정함을 누군가에게 이해받길 바란다. 그러나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다. 진심은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심은 예측 불가능한 감정의 파도고, 때로는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이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조종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그렇게 해야만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알량한 믿음 속에서, 관계를 잃고, 감정을 잃고, 결국 자기 자신마저 희미해진다. 그는 보호라는 착각 속에서 고립되어 간다.




끝없는 허언의 반복은 일종의 자기 구제 장치다. 변명을 통해 죄책감을 분산시키고, 타인의 반응으로 자신의 양심을 덮는다. 도망자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감정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두려운 사람이다. 이 구조는 무책임이자, 공포의 모면이다. 슬픔에 빠지는 것보다, 슬픔이 끝나지 않는 것을 겁내는 사람. 그래서 그는 감정을 사전에 조절하려 하고,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도망자는 진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진심 뒤의 무너짐이 두려운 것이다. 거대한 마음이 그를 바꾸어버릴까 봐, 너무 깊이 이입하게 될까 봐 감정을 전략처럼 다룬다. 무심함으로 말하고, 무관심으로 포장한다. 그는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느끼는 인간이다. 문제는, 감정의 깊이를 인정하지 못한 채, 끝내 자신을 통제 속에 가두려 한다는 점이다.


투사적 동일시. 그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한 뒤, 그것을 상대가 대신 살아내게 만든다. 타인의 혼란 속에 자기감정의 흔적을 남기고, 그것을 외부에서 바라보며 정리한다. 하지만 이 구조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왜곡된 자신일 뿐이다. 던져진 감정에 타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확인한 채, 본래의 감정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긴다. 그렇게 그는 타인의 눈 속에서, 타인의 파괴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감상한다. 비극은 그가 그 감정을 온전히 살아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도망자는 결국 자기 자신을 완결 짓지 못한 채 살아간다. 책임감과 정직함을 앞세우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책임은 지지 못한다. 그는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착각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무의식에 또 다른 죄책감으로 각인되어 그를 따라다니고 괴롭힌다. 도망자는 합리화된 연극, 옮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정당화 심리, 이기적인 포장지 속에서 끝내 현실을 마주 보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서 온전히 도망칠 수 없다. 감정은 언젠가 돌아오고, 기억은 무의식의 문을 열어 다시 흘러나온다. 도망자는 언젠가 그 무너짐을 자기 안에서 목격하게 된다. 그때, 멈춰 서서 자기감정의 뿌리를 직면할 수 있는 자만이, 도망자에서 존재의 주인으로 변화한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며, 진정한 자유의 시작이다. 더 이상 타인의 감정을 이용하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 인간은 반드시 그 지점을 통과해야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도망자가 있다. 감정으로부터, 관계로부터, 자기 존재로부터 도망치는 이들. 그러나 모든 도망에는 끝이 있다. 반드시 사실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때, 누군가는 다시 도망치고, 누군가는 멈춰 선다. 중요한 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도망치는 삶에서 멈춰 선 존재로, 인간은 언제나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 가능성 하나가, 이 불완전한 인간을 끝내 희망의 자리로 이끄는 유일한 이유다.




모든 도망의 구조를 꿰뚫어 보고, 그 너머에 도달한 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하지 않는다. 감정이 추해 보일까 두려워하지 않고, 평가에 움츠러들지 않는다. 슬픔은 눈물이 되어 흐르고, 억울함은 언어가 되어 터지고, 분노는 새로운 형태로 피어오른다. 그들은 무너지되 무너진 채로 존재하고, 그 잔해 위에서 다시 일어난다. 이들은 타인 앞에서 포장된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숨기지 않기 때문에 방어하지도 않는다. 죄책감에 떠밀려 선을 행하지 않고, 진심 어린 마음만으로 행동한다. 그것은 조용하고 투명하다. 계산이 없고, 위선적이지 않으며, 목적도 없다.


강함이란 그런 것이다. 단단한 언어로 자신을 치장하는 능력이 아니라, 말없이도 흔들릴 수 있는 용기.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울고도 도망치지 않는 힘. 감정의 격랑을 견디며, 본질을 통과해 자기 존재의 중심에 도달하는 사람. 그 중심에는 자기 연민이 아닌, 명확한 자기 인식이 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성찰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강해진다. 세상이 그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는 더 이상 이해받기 위해 변명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살아서 존재하는 강한 자다.


이러한 존재는 낭만적이다. 고통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지나 삶의 잔향을 사랑하는 태도. 모든 관계가 무너지더라도, 그 안에서 배운 감정을 기억하며 사람을 향해 걷는 삶. 과거를 합리화하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지금을 바르게 응시하는 눈동자. 그런 눈을 가진 자는,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다. 강함이란, 결국 모든 것을 끝까지 느끼고, 왜곡 없이 자신을 바라보며, 다시 인간 곁으로 다가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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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하라. 표현하라. 그리고 다시 태어나라.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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