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치기

자르는 그 순간

by 김가희


칼날이 닿자, 나무는 숨을 접는다. 불필요한 가지와 빛을 막던 잎이 한순간 낙하한다. 찰나의 진공 속, 드러난 빈 틈에서 새싹이 번뜩인다.


우리는 변화 앞에 설 때마다 결핍을 통과한다. 오래 붙잡던 신념이 떨어져 나가고, 익숙한 관계가 매섭게 끊긴다. 허전함 속에서만 뿌리는 더 깊이 물을 당긴다. 손실을 받아들인 자리에 공기가 돌고, 공백이 통로가 되어 빛이 스며든다. 변화는 결국, 내면을 환기시키려는 생명의 습관이다.


결단 앞에서는 두 힘이 맞선다. 한쪽은 “보존하고 싶다”는 애착이고, 다른 한쪽은 “떼어내야 산다”는 본능이다. 가지를 자르기 전, 저마다의 매달린 추억으로 인해 잠시 망설인다. 그러나 방치된 가지는 병충해를 부르고, 흐릿한 잎은 햇빛을 삼킨다.


기어코 날을 들이대는 순간 잘린 단면에서 수액이 흘러나온다. 고통은 즉각적이지만 재생 또한 즉각 준비된다. 갈등을 해소하는 힘은 결단이 아니라, 단절 직후 퍼지는 회복의 기억이다. 그 기억이 “잘려도 산다”는 메시지를 뿌리까지 보내고, 나무는 피할 수 없는 상실을 수용한다.


마음도 나무와 다르지 않다. 깨달음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감정이 부딪칠수록 의식은 느슨해지고, 속에서는 새 자리를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금이 가는 순간, 우리는 처음으로 마음속 골격을 똑바로 본다. 뒤엉킨 기억 중 무엇을 잘라내고 무엇을 남길지 선택해야 한다. 잃을까 봐 두렵지만, 동시에 새로운 감각이 조용히 트고 있다. 견딘 통증의 자리에 다시 연결이 자라난다. 가지치기의 아픔과 회복 사이, 실제로 필요한 건 단 한 번의 숨을 고르는 시간뿐이다.



가지치기를 뒤흔드는 근본 정서는 그리움이다. 집착이 아닌, 잃어버린 연결을 향한 갈망이다. 마른 잎을 떼어내면서도 우리는 녹색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움이 없다면 마른 살을 도려낼 수 없다. 잘라야 할 명분도, 다시 돋울 힘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움은 상실을 통로 삼아 현재와 미래를 잇는다. 결국 잘려 나간 자리마다 돋아나는 것은 한 장의 잎이 아니라, 상실을 되새긴 끝에 피어오른 희망의 새살인 것이다.


변화의 갈등은 외부와 내부, 과거와 미래가 충돌하는 자리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 오래된 가치가 다음 방향을 가로막을 때 마음은 분열을 겪는다. 나무는 말라죽은 가지와 살아 있는 줄기를 구분하고, 인간은 더딘 신념과 현재의 필요를 갈래 낸다. 분리 과정에는 비난과 후회의 낙엽이 매달리지만, 가지를 남김없이 쳐낸 후에야 빛의 각도가 넓어진다. 빛이 들어온다는 사실만이 칼날을 정당화한다. 이는 끊어낼수록 명료해지는 상실의 역설이다.



새싹은 공백을 경유해 돋아난다. 잔혹한 듯 보이는 공백 속, 모든 탄생은 시작된다. 가지치기로 확보된 여백 사이로 바람이 순환하며, 나무는 에너지를 성장에 집중시킨다. 인간 역시 관계와 역할을 덜어낸 틈에서 미처 듣지 못하던 내면의 음성을 듣는다. 이는 방향을 내리꽂는 명령이 아니라, “지금 어떻게 살아 있다고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가깝다.


계절마다 가지는 다시 무성해지고, 다시 잘라내야 빛이 유지된다. 가지치기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처럼 변화는 정지된 사건이 아니라 주기적인 환기다. 고정된 것은 없다. 우리는 살면서 반복적으로 불필요한 신념을 덜어내고, 새로운 정체성을 싹 틔운다. 순환되는 상실 속 통증이 덜어지지는 않지만, 통찰만은 더욱 정교해진다.


가지치기가 남기는 것은 공백이 아닌 가능성이다. 잘라낸 곳에서 스며드는 빛이 쌓이면, 나무는 이전과 전혀 다른 형태로 자라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허무와 상실을 기꺼이 맞을 때 우리는 다른 모양의 시야를 얻을 수 있다. 그 시야는 다음 질문을 불러온다. 더 잘라야 할 곳은 없는가? 그리고 무엇이 더 자라나길 원하는가?


새로운 잎이 달려 무게를 더할 때, 우리는 칼날을 기억해 낸다. 통증과 성장을 동시에 품은 채, 다시 빛을 보기 위해 칼을 들 준비를 한다. 빛의 방향을 내 손으로 정하는 힘. 그것이 가지치기가 우리에게 남긴 삶의 진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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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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