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동해 19화

안착

쉰일곱

by 김가희





겸. 나는 요즘 내 삶을 돌아볼 때 더는 급히 이름을 붙이지 않게 되었다네. 무엇을 이뤘는지, 어디까지 왔는지를 세어보지 않아도 몸이 먼저 알고 있었지. 오래 걸린 길이었고, 돌아간 적도 많았으나 결국 나는 이 자리에 와 앉아 있었네. 이제는 증명보다 흔들리지 않는 하루의 무게가 나를 지탱하고 있었지. 여기까지 왔다는 말이 사실처럼 놓이는 순간이었네.


예전의 나는 늘 앞을 보며 달렸지. 아직 오지 않은 자리를 미리 걱정했고, 부족하다는 감각으로 스스로를 밀어붙였네. 돌이켜보면 결핍이라기보다는 아직 설 자리가 없었던 탓이었지. 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더 크게 움직일 수밖에 없기 마련이야. 그 시절의 불안은 나의 성격이 아니라 환경이 만들었던 긴장이었지. 그래서 나는 과거의 나를 탓하지 않게 되었네. 그때의 흔들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 고요도 없었을 테니 말일세.



지금의 나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네.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이 또렷이 갈라졌고, 선택의 기준은 외부에 있지 않지. 결정은 빠르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고, 방향은 조용히 유지된다네. 이것이 내가 얻은 주도권이라 생각하네. 위에 서서 명령하는 왕이 아니라, 중심에 앉아 흐름을 다스리는 사람의 자세 말일세. 삶은 더 이상 나를 시험하지 않고, 나는 삶을 설득하지 않는다네. 그저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며 함께 굴러가고 있을 뿐이지.


이제 나는 앞만 보지 않는다네. 이미 만들어진 기반 위에서 다음 방향을 천천히 살핀다네. 급히 넓히지 않아도 확장은 자연히 따라온다는 걸 알게 되었지. 작은 계획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 그 그림은 다시 다음 원을 예고한다네. 멀리 있는 가능성보다 지금 손에 닿는 현실을 신뢰하게 되었지. 씨앗을 던지는 대신, 뿌리가 어디까지 뻗었는지를 먼저 살핀다네. 그래서 움직임은 적어졌으나, 닿는 범위는 더 넓어졌지.



겸. 이 모든 흐름을 지나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네. 성취란 더 높이 오르는 일이 아니라, 넓어진 삶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나 혼자의 균형만이 아닌 누군가를 함께 세울 수 있는 자리에 와 있지. 이 자리는 우연히 얻은 것이 아니기에 빼앗길 것도 아니라네. 그래서 서두르지 않고, 과장하지 않으며, 다만 지키기로 한다네. 다음을 향한 불씨는 이미 충분히 타고 있으니, 나는 이 불을 급히 키우지 않으려 한다네. 지금 이 자리에서 단단히 살아가며 말일세.




이 자리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 변화는 삶이 갑자기 쉬워졌다는 감각이었네. 일이 줄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이지. 예전에는 매 순간이 선택처럼 느껴졌고, 선택은 늘 책임과 불안을 함께 데려왔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네.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고, 하지 않아도 될 일도 또렷해졌지. 삶이 복잡하다고 믿었던 것은 사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네. 손을 놓자 흐름이 보였고, 흐름을 보자 마음이 가벼워졌지.


나는 더 이상 삶을 해석하려 들지 않는다네. 의미를 붙이기보다, 지금 이 순간이 어떻게 놓여 있는지를 느끼는 데 집중하지. 아침의 빛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작업실의 공기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것처럼 말일세.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하루는 충분히 채워진다네. 무엇을 더 가져야 만족할지를 묻지 않게 되었고, 대신 이미 받은 것들을 세어보게 되었지. 그 숫자는 늘 기대보다 많았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설명 없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하루를 산다네.


이 시선은 어릴 적의 그것과 닮아 있네. 세상을 이해하려 애쓰기 전, 그냥 바라보던 눈 말일세. 좋고 나쁨을 나누기보다, 그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던 때의 감각이지. 다시 그 눈을 얻게 될 줄은 몰랐네. 하지만 삶이 단순해지자,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돌아왔지. 사람을 볼 때도, 일의 결과를 볼 때도 판단이 앞서지 않네. 투명하게 본다는 것은 순진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불필요한 덧셈을 하지 않는다는 뜻임을 이제는 안다네.



요즘의 나는 빛을 쫓지 않는다네. 이미 빛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더 밝아지려 애쓰지 않아도 하루는 충분히 환하다네. 과거에는 늘 어디엔가 도달해야만 비칠 수 있다고 믿었지. 그러나 지금은 서 있는 자리 자체가 이미 조명을 받고 있다는 걸 느낀다네. 이 안정감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시선이 바뀌며 생겨난 것이었지. 그래서 쉽게 흔들리지 않고, 쉽게 어두워지지도 않는다네.


이 시간은 어떤 성취의 기록이 아니라, 감각의 회복에 가깝다네. 삶을 다시 가볍게 들 수 있게 된 순간들이지. 복잡한 질문 대신 단순한 하루를 택하게 되었고, 미래보다 현재를 더 정확히 보게 되었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는다네. 대신 오늘의 리듬을 존중하며 산다네. 이 상태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중요하지 않지. 다만 지금, 나는 분명히 빛을 받으며 살고 있다네.




이 무렵부터 사람들의 얼굴이 새삼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네. 늘 곁에 있었던 이들도, 오래 보지 못했던 얼굴들도 이전과는 다른 결로 다가왔지. 예전처럼 관계의 의미를 먼저 따지지 않게 되었고, 대신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먼저 와닿았네. 웃음은 계획되지 않았고 만남은 목적을 갖지 않았지. 어색함을 정리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흘러갔네. 나는 이제 사람들 속에서 나를 조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조금씩 배우고 있었네. 이 변화가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무언가가 다시 움직이고 있었지.


어느 순간부터 기억들이 다르게 떠올랐네. 과거가 정리된 이야기처럼 닫히지 않고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거는 느낌이었지. 그때의 장면들은 여전히 미숙했지만 부끄럽지 않았네. 잘못 보다는 맥락으로, 후회보다는 흐름으로 보였으니까. 지나간 관계들이 나를 가둔 것이 아니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네. 그래서 기억은 짐이 아니라 재료처럼 느껴졌지. 아직 다 쓰이지 않았지만, 분명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일세.



사람과 마주 앉는 일이 여전히 쉽지는 않았네. 하지만 예전처럼 긴장하지도 않았지. 잘해야 한다는 생각도, 이해받아야 한다는 조급함도 줄어들었네. 대신 지금의 내가 어디까지 열려 있는지를 살피게 되었지. 가까워질 수 있는 거리와 그렇지 않은 거리를 구분하는 감각이 조금씩 생겨났네. 이건 단절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배우는 과정에 가까웠지. 나는 아직 완전히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네.


요즘의 관계들은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았네. 깊다고 말하기엔 이르고, 가볍다고 넘기기엔 묘하게 남아 있었지. 하지만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나를 살게 했네. 모두가 정해진 역할이 없었고 누가 먼저 책임지지도 않았지. 그래서 숨이 막히지 않았기에 필요 이상으로 얽히지도 않았네. 관계는 나를 고정시키지 않고 앞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었지. 이 낯선 리듬이 싫지 않았네.


이것은 안정이라기보다 다시 열림에 가까웠네. 나는 아직 누구를 이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다네. 다만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움직임이 나를 소진시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지. 관계는 이제 완성의 증거가 아니라, 가능성의 신호처럼 느껴졌네.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 멈춰 있지는 않았지. 그래서 나는 이 상태를 서두르지 않으려 하네. 아직은 불씨가 살아난 단계니까 말일세.




이 무렵부터 나는 하루를 나 혼자만의 리듬으로 끝내지 않게 되었네. 누군가의 일정이 내 시간표 안으로 들어왔고, 그 변화가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았지.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가 달라졌네. 이전에는 나를 증명하기 위한 약속이었다면, 지금은 누군가의 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받쳐주는 일이 되었지. 그래서 나는 쉽게 약속을 만들지 않고, 만든 것은 끝까지 책임지려 하네. 이 태도가 주변을 안정시키기 시작했지. 그 변화는 분명했네.


생활의 기반도 같은 방식으로 달라졌네. 집과 작업실은 더 이상 나만의 피난처가 아니었지. 누군가 머물 수 있었고, 누군가는 이 공간을 기준 삼아 하루를 정리했네. 나는 그 구조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율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지. 필요 없는 확장은 막았고, 필요한 것에는 주저 없이 자리를 내주었네. 움켜쥠이 아니라 관리에 가까운 태도였지. 이 고정이 있었기에, 다른 사람의 불안을 흡수하지 않고도 함께 설 수 있었네.


이때부터 판단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네. 감정을 달래는 말보다, 상황을 정리하는 말이 필요해졌지. 나는 위로를 먼저 건네지 않고 무엇이 가능한 지부터 짚었네. 누군가의 선택을 대신하지는 않았지만, 그 선택이 무너지지 않도록 선을 그어주었지. 이 판단은 차갑지 않았네. 오히려 감정이 과도해질 때,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손잡이였지. 말의 무게가 달라졌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네.



사람들은 점점 내게 기대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 기대를 키우지 않았네. 대신 기준을 분명히 했지. 여기까지는 내가 책임질 수 있고, 그 너머는 각자의 몫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네. 이 거리는 관계를 약하게 만들지 않았어. 오히려 오래 가게 했지. 내가 흔들리지 않으니, 상대도 불안에 휩쓸리지 않았네. 이끌어야 한다는 의식 없이도, 자연히 방향이 잡히는 순간들이 있었지. 그때 나는 알았네. 자리는 주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감당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겸. 이것은 성숙의 선언이 아니네. 나는 다만 지금의 내가 무엇을 맡을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을 뿐이지. 힘은 절제되어 있고, 기반은 유지되며, 판단은 타인을 향해 쓰인다네. 이 세 가지가 맞물리자, 삶은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게 되었지. 대신 맡겨도 되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네. 그래서 나는 서두르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이 자리를 지키려 하네. 이 원은 그렇게 닫히고, 다음 원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시작되고 있었네.





삶은 지금의 자리를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단단해지며

사람이 설 자리는 책임과 판단을 통과하며 유지되는 구조고

인생은 감당한 만큼 자연히 닫히고 다시 열리는 하나의 원이다.


{동해} 빈자리 위의 충만을 붙잡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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