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3. 글래디에이터2] 불안과 기대는 감동으로 돌아온다
개봉일에 맞춰 가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연례행사로 영화제에 가서 개봉보다 1-2년 전에 보게 되는 경우가 차라리 다수인 게 사실이다. 이번만큼은 꼭 당일날 리들리 스콧의 그림을 만나고 싶었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글래디에이터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남은 영화의 예고편과 장면장면 그 시퀀스들이 생각난다.
스물네 번의 알록달록한 계절이 지났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난 리들리 스콧의 작품. 그가 만든 풍경은 그의 손길로 가득했다.
바보같이 시간 계산을 잘못한 나는 예고 없는 지각드라마를 썼다. 아주 익숙하게 찾아간 상영관 앞에서 문을 열고 들리는 음악으로 영화와 인사했고 빛의 속도로 영상 웨이브를 탔다. 파도가 잔잔해졌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가 사라질 때쯤 앞 장면이 궁금한 나는 처음으로 동시간에 콘텐츠를 누린 옆 관객분께 물었다. 첫 장면이 어떻게 시작되었냐고.
관에 들어갈 때 잠시 주춤하고 한 템포 쉬다 자리를 찾은 것은 시각과 청각이 엮여있는 내가 마주한 장면 속 사람들이 침울하고 안타까운 상황에 공감하고 있음을 즉각적으로 느꼈기 때문이고. 착석과 함께 안드로메다 급으로 눈앞에 서있는 씬을 즐겼지만 상황종료를 지기하고 나니 다시 궁금증이 비집고 올라온 것이다.
답변은 아주 진부했지만 예상대로였다. 아름다운 시골마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어요 이런 느낌.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이 정도로)
24년 전 글래디에이터를 예나 지금이나 언제 보더라도 자연의 숭고한 모습을 바라보듯 ‘형용할 수 없는 형용할 틈도 없는 아름다움’을 보듯 반응할 수 있는 건 생을 살아가는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를 진실로 다루기 때문 아닐까 싶다. 굉장히 지루하고 고루한 대서사시로 여겨질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4년 전 글래디에이터 화면과 속편 글래디에이터2 장면의 간극은 컸다. 마치 게임에 등장하는 이미지나 배경처럼 보여 내게는 생경한 풍경 같았다.
한 번은 친한 동생에게 레이저관과 스크린X, 2D관이 어떤 차이인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좁고도 깊은 지식을 모두 겸비한 그녀는 레이저관의 스크린이 더 고품질이라 선명하게 보인다. 스크린X는 관객방향 제외 삼면을 다 써서 보여주지만 선명도가 덜하다고 설명해 주었다. 사실 갓눈이 아니면 큰 차이를 느끼기는 어렵다.
이전에 본편에서 본 장면은 백색노이즈가 낀 영화필름이 전쟁과 인물 간의 갈등 속에 낀 먼지처럼 느껴져서 동기화가 된 기분이었는데, 이번에 관람한 속편의 현재 씬은 지하철이나 친구네 집 모니터에서나 보게 되는 게임의 한 장면 같았다.
예술가는 자기 작업의 결과물에 자신의 철학이나 살아온 흔적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리들리 스콧이 24년 후에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그래서 내가 팬심을 이어갈 수 있어 기쁘다. 이런 충만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관람 종료 후 옆에 계신 분과 나눌 수 있어 기쁜 수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