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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워킹맘, 시작해 볼까?

이제 더 이상 도움의 손길은 없다.

by 정벼리 Mar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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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년 간 육아휴직 중이던 남편이 오늘 아침, 394일 만에 출근을 했다. 그 394일 동안 집안일과 아이 돌봄은 오롯이 남편의 책임 아래 있던 덕택에, 나는 아침마다 아이보다 늦게 일어나서 아침밥 먹는 아이와 남편에게 손을 흔들며 출근을 하고는 했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아이를 깨우고, 밥을 먹이고, 학교 갈 준비를 시키는 아침 일과가 내 몫이다. 내 사무실은 집에서 가깝지만, 남편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왕복 세 시간을 오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젯밤 잠이 들기 전에는,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뭐랄까 설레며 심장이 콩닥거리더라. 지금까지와 달리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감에 어서어서 잠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면서도, 일어나면 제일 먼저 씻고, 부엌에 가서 딸기를 씻어 받치고,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고...혼자서 동선을 그려 보느라 그 '잠'님이 쉬이 오시질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게, 나는 아이가 영아기를 벗어난 이래로 아침 일과가 이처럼 오롯이 내 몫이었던 적이 없었다.


  8년 전 복직을 앞두고 어린이집도 돌보미도 구하지 못한 나는 울면서 엄마에게 SOS를 쳤더랬다. 아등바등 공부시킨 큰딸래미가 육아에 발목 잡힌 채 사회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겁이 덜컥 난 엄마아빠는 그날로 부동산을 몇 바퀴 휘휘 돌더니 열흘 만에 지근거리로 이사를 오셨다. 그 뒤로 지지난 겨울까지 새벽이면 엄마가 우리 집으로 출동하여 아이의 아침 일과를 몽땅 챙겨주셨다.


  갑작스러운 지방 발령으로 지금 사는 동네로 이사 온 뒤로는 더 이상 엄마 찬스는 쓸 수 없었지만, (그 찬스는 마침 첫 아이를 낳은 동생에게로 향했다.) 그토록 '잠시 쉬어보는 것'이 소원이던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면서 나는 다시 일 년 남짓 자유부인의 아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여섯 시, 남편이 일어나는 기척에 눈이 반짝 떠졌다. 평소 일어나던 시간이 아니라 사실 무지하게 일어나기 싫었지만 억지로 일어났다. 복직 첫날부터 깜깜한 현관에 남편 혼자 뎅그러니 세워두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물론, 394일 전까지 각자 출근하기 바빴지 굳이 남편을 배웅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오늘은 특별히!)


  파이팅, 차 조심해, 이따 봐, 남편을 보냈다. 지난밤의 계획대로 싱크대로 향해서 딸기를 씻어 물기를 받치고, 달걀을 풀어 저었다. 아뿔싸, 우유를 조금만 넣는다는 게 왕창 부어버렸다. 달걀을 하나 더 풀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같이 아침밥을 먹어보자 싶어 커피도 한 잔 내렸다.


  아침부터 제일 반짝반짝 빛나고 예쁜 접시를 꺼내 따뜻하게 데운 크로와상과 달걀을 올렸다. 딸기도 소복하게 담아내고, 딸을 위한 우유 한 잔과 내 커피잔을 나란히 두었다. 거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화려한 알스트로메리아 꽃병도 부산스레 식탁에 옮겨 두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깨워 식탁 앞에 앉혀 숟가락을 드는 모습마다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식사를 마친 아이 머리카락을 싹싹 빗어 예쁘게 묶어주고 나니, 이럴 수가, 이토록 완벽한 아침이라니! 내가 이렇게 야물딱진 워킹맘인줄 나조차 모르고 있었지 뭐야. 아직 퇴근은커녕 출근도 안 했건만 벌써부터 '갓생이 별 건가‘ 싶더라.


  하지만 내 하루는 이제 시작이지.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늦지 않게 학교 가라는 외침을 남긴 채 집을 나섰다. 회사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할 때쯤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학교 안 가고 왜 전화를 해?"

"엄마! 내 물통 어딨어?"

"아! 물통... 잊어버렸다. 싱크대에 물통 있으니 챙겨."

"아빠는 아침에 보리차 싸줬었는데."

"겨울도 끝났는데, 정수기 물 받아가."

"내일부터는 보리차 끓여주면 안 돼?"

"엄마 바빠. 나중에 얘기해. 빨리 학교나 가!"


  갓생은 무슨. 이렇게 진정한 워킹맘의 생활이 시작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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