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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힘들게 해서 미안해

나 원, 별소리를 다 듣네.

by 정벼리

아파트 엘리베이터 교체공사가 시작되었다. 사용연한이 다 되어 더 이상 공사를 미룰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집은 그렇게 엄청난 고층은 아니라 큰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만 대비하고자 생수와 탄산음료만 넉넉하게 미리 배송시켜 냉장고에 줄 맞춰 넣어 두었다. 장보기야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만 조금씨 사 오면 되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당연하게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른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이 세상 만물을 대할 때를 통틀어 이르는 말인가 보다. 출퇴근하며 한 번, 운동 다녀오며 한 번, 강아지 산책시키느라 한 번, 못해도 하루에 세 번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쩌다 못 참고 배달음식이라도 시키거나 급한 택배라도 오는 날이면 추가로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야 했다. 엘리베이터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였다니, 나중에 노년에는 루프탑 정원이 있는 삼층 벽돌집에 살고 싶다는 로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엘리베이터의 빈 자리를 두 다리로 체험하는건 나 뿐만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요즘 아이들은 교과서를 사물함에 두고 다니느라 가방이 무거울 일이 없다는데, 우리 아이는 평소에도 학원 교재 때문에 가방 가벼울 날이 거의 없다. 우리 집만의 상황은 아닐 것 같다. 어쨌든 공사 시작 이후로 아이는 계단 오르기가 힘들다며 입을 삐죽 내밀기가 일쑤였다. 게다가 지난주에는 이틀 연속으로 학교에서 생존수영을 다녀왔는데, 영 지쳤는지 생존수영 둘째 날에는 학원 끝날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나 너무 힘들어. 수영해서 그런지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는데, 가방에 수영가방까지 무거워서 집에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모르겠어."


더위도 한풀 꺾여가는 중이니, 정 힘들면 엄마가 퇴근해서 갈 때까지 30분 정도 집 앞 놀이터에서 쉬고 있으라고 일렀다. 엄마랑 같이 계단을 오르자는 말에 아이는 급격하게 밝아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럼 나 학원 버스 내리면 과자 하나 사 먹고 있어도 돼?"


아이는 아이다. 나는 소리 내어 웃으며, 먹고 싶은 걸로 아무거나 먹으라 답했다.


퇴근 후 발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저 멀리 놀이터 그늘막 벤치에 앉아 있는 우리 아이가 보였다. 세상에, 아무거나 사도 된다고 했더니 평소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던 대형 봉지과자를 샀나 보다. 제 상체만한 과자를 야무지게도 끌어안고 혼자만의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다가가서 보니 1/3도 채 먹지 못했다.


"아이고, 안 그래도 짐도 많은데, 어떻게 들고 올라가려고 이렇게 큰걸 샀어?"
"괜찮아. 내가 들면 되지!"


씩씩하게 웃는 아이를 향해 곱게 눈을 흘겼다. 제 가방은 무거워서 못 들어도 과자 봉지는 너끈히 들 수 있다 이거지.




아파트 현관 앞에서 나는 앞 뒤로 백팩을 겹쳐 멨다. 등 뒤에는 내 가방, 가슴 앞으로는 아이 가방. 아이는 수영가방과 커다란 과자봉지를 양손에 들었다. 아이가 앞서서 계단을 오르고 내가 뒤따랐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과자봉지가 너무 크다. 2층도 못 다다른 중간 층계참에서 아이를 향해 말했다.


"과자봉지 엄마 줘. 그러다 너 넘어져."
"아니야, 엄마 가방 두 개나 들었잖아."
"괜찮아. 엄마가 들게."


앞뒤로 나란히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4층을 넘어서니 가방 무게가 조금씩 버거워지고, 6층을 넘어서니 나도 모르게 멈춰섰다. 아이고, 큰 숨을 내쉬었다. 아이가 뒤를 돌아보고 물었다.


"엄마, 많이 힘들어?"
"아니야. 이러고 가니까 너 아기 때 생각나고 재밌네."
"내가 아기 때가 왜 생각나?"
"아기띠로 별이 안고, 기저귀가방이랑 시장바구니랑 양 어깨에 이고 지고 다녔지."
"어딜 그렇게 다녔어?"
"별이 바람 쐬주러 공원에도 나가고, 마트도 가고, 병원도 다니고 했지."
"엄마 정말 힘들었겠다."
"그래도 엄청 행복했지."
"나 때문에 맨날 무거웠겠다. 미안해."
"아니야, 행복했다니까."
"그래도 지금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응, 지금은 좀 무겁긴 하다."
"옛날에도 지금도 힘들게 해서 미안해."
"괜찮아, 옛날에도 지금도 엄마는 아주 행복해."


나 원 참. 아기띠에 두 발을 대롱대롱 내놓고 있던 오동통한 아기가 이렇게 길쭉 자란 것도 신기한데, 너에게서 별소리를 다 듣는다. 예쁜 말은 듣는 이에게 힘을 준다더니, 아이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꺼내놓는 깜찍한 말들에 나도 힘이 절로 솟았다.


그래, 너를 위해서면 이깟 계단, 이고 지고 백 층이라도 오를 수 있지. 너는 가끔 엄마 힘내라고, 그렇게 예쁜 말 한마디씩 던져주면 그걸로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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