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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시간이 필요해

그래, 방학의 묘미는 자유로움이지.

by 정벼리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아이는 짐을 꾸려 3박 4일간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먹고 싶은 음식 리스트도 한가득 가지고 갔다. 어려서 할머니 손에 큰 아이답게 입맛이 아주 할매입맛이다. 매생이국, 호박전, 광어 세꼬시, 물회, 편육, 짜장면... 나는 쉽게 내주지 않는 음식들이다. (손이 너무 많이 가거나, 내가 별로 안 좋아하거나.)


손녀딸이라면 덮어놓고 세상 최고인 우리 엄마는 뭐든지 먹고 싶은 걸 다 해주고 다 사주고 싶다며, 몇 주 전부터 아이 방학만 손꼽아 기다렸다. 방학이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전화통화를 하며 엄마가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 별이는 이번 방학 때 할머니 집에서 며칠이나 있다 갈란가?"
"월요일에 가서 수요일에 오려고요."
"으잉? 두 밤 밖에 안 자고 가려고? 할머니 서운하게! 한 주는 있다가 가."
"음... 그건 좀 곤란해요."
"왜? 할머니는 우리 손녀딸 오면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두 밤 가지고는 안 돼."
"그 다음 주부터는 매일 학원 가야 해서, 아무 일정이 없는 건 딱 한 주뿐이에요. 할머니가 정 그러시면 하룻밤만 더 자고 목요일에 집에 올게요."
"에이, 주말까지 있다 가면 안 될까?"
"안 돼요. 주말에는 엄마 아빠가 집에 있잖아요. 금요일 하루 정도는 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뭐? 혼자만의 시간? 푸하하하!


아이는 보통 전화통화를 스피커폰으로 하는지라,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나도 함께 빵 터졌다. 전화기 너머에서도 우리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웃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니 우리 집 꼬맹이가 좀 컸다고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저 우스웠다.




아이가 할머니 집에 가있는 3박 4일은 쏜살같이 가버렸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표현을 찾기 어렵다. 조금 비슷하게 분명한 표현으로는, 눈 깜박하니 아이를 데리러 갈 날이 되었다 정도를 들 수 있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며, 전화를 걸어 다시 물었다.


"별이야, 엄마 이제 너 데리러 출발해."
"응, 엄마. 나 할머니랑 같이 짐 다 싸놨어."
"근데 내일 진짜 집에 혼자 있을 수 있어? 엄마가 지금이라도 휴가 내고, 내일 같이 있을까?"
"아이 참, 괜찮다니까. 나도 나만의 시간을 좀 즐길게. 방해하지 마."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볼게. 점심은 어떡해? 점심시간에 엄마가 집에 잠깐 와서 밥 차려줄까?"
"아니, 괜찮아. 그냥 김밥이나 시켜줘. 혼자서 TV 보면서 자유를 즐길 거야."


아주 초지일관 대쪽 같은 태도였다.




아이 혼자 있는 집에 배달음식을 시키기는 아직 내가 마음이 놓이지 않고, 결국 지난 금요일엔 도시락을 싸놓고 나왔다. 일전에 직장 동료 C가 강조했던 것과 같이 '보온도시락'에 말이다.


밥통에는 볶음밥을 소복하게 담고, 국통에는 전날 엄마가 싸준 매생이국을 데워 넣었다. 아침에 버무린 오이샐러드와 후식으로 먹을 복숭아 반쪽도 반찬통에 담아두었다. 요새 키가 크려는지 한참 먹성이 좋은 아이가 혹시나 배고플까 식탁 위에 귤 몇 개와 쿠키도 함께 올려두었다.


그래도 어쩐지 불안해서, 중간중간 홈캠을 통해 아이가 잘 지내는지 들여다봤다. 하루 종일 잠옷 바람으로 소파에 모로 누워 강아지와 킥킥대고, 점심때가 되니 도시락 통을 열어 TV를 보며 혼자서도 밥만 잘 먹더라. 잘 있어서 안심이면서 한편으로 얘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었다.


그래, 방학의 묘미는 자유로움이고 이렇게 늘어지게 여유를 만끽하는 날도 필요하지. 오늘 하루는 원 없이 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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