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은 금발 벽안의 공주 이름인 줄 알았다나.
딸아이의 머리카락은 곧 엉덩이에 닿을 듯 길었다. 숱 많은 머리칼은 제 아빠를 닮아 아주 살짝 반곱슬기가 돈다. 그래서 빗질을 열심히 해도 부스스함을 완전히 가라앉히기 어렵다. 가끔 외출 전이면 머리를 풀어헤친 채 거울 앞에서 한껏 예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아이를 향해, 기어코 머리를 풀어야겠다면 빗질이라도 좀 하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면 딸아이는 억울한 눈빛으로 항변한다.
"이미 열심히 빗었단 말이야!"
나도 저 나이 때는 무조건 긴 머리가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긴 머리를 고수하려는 아이의 취향을 웬만하면 존중해주고 싶다.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어야 할 텐데, 긴 머리카락을 향한 아이의 욕심은 끝이 없다. 아무리 길게 길러도 더 기르고 싶단다.
남편과 나는 미용실에 갈 때마다 아이를 구슬려본다. 이번에 미용실에 같이 가서 머리를 조금만 자르면 예쁜 웨이브 파마를 해주겠다거나, 올 때 하프갤런 사이즈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거나 하는 미끼를 던져본다. 그렇지만 아이는 요지부동이다. 그저 치렁치렁 긴 머리를 계속 기르는 것만이 본인이 원하는 것이란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에게 삼손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우리 아이는 종교가 없다. 아이는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당에 가본 것도 손에 꼽을 정도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을 알 리가 없다. 삼손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삼손아, 부르면 아이는 세상만사에 쿨하고 무심한 척 피식 웃고 말 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정말 사춘기가 오는가 싶다.) 그러다 어느 날 궁금하긴 궁금했는지, 딴청을 피우며 슬쩍 물어왔다.
“근데... 삼손이 누구야?”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데, 힘이 아주 센 사람이야. 그런데 머리카락이 잘리면서 힘을 잃어버리게 돼.”
“힘이 얼마나 센데?”
“성경에는 머리카락이 잘리기 전에는 맨손으로 사자도 잡았다고 쓰여있어.”
“오오, 대단하다!”
아이는 심손의 힘에 감탄(?)하며 깔깔 웃었다. 삼손 이야기를 더 해달라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종교가 없어도 그렇지, 삼손을 모른다니 이건 상식의 영역인 듯했다. 나는 아이에게 성경은 서양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어서 성경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예술이 많다는 것을 설명해 주며, 스스로 성경을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했다. 그리고 곧장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가서 쉽게 쓰인 성경 이야기 책을 빌려왔다.
집에 오자마자 아이는 성경 이야기 책에 푹 빠져들었다. 거실 소파 구석 자리에 쿠션 하나를 받치고 앉아 책 속으로 빠져들어갈 듯 읽어 내려갔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우리 부부는 집 앞 공원을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공원 트랙을 열심히 걷고 있을 때,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한참 책을 읽고 있었을 텐데 무슨 일인가 싶어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수신 버튼을 터치하자마자 아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삼손은 남자잖아!"
“응? 삼손이 당연히 남자지."
“나는 엄마 아빠가 나한테 삼손이라고 불러서, 긴 금발머리의 예쁜 공주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단 말이야!"
“푸하하하! 삼손이 공주인 줄 알았어?”
“아, 몰라! 엄마 미워!!"
심통이 단단히 난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크게 웃었다. 옆에서 전화통화를 듣고 사태를 눈치챈 남편도 같이 배를 잡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