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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이 싹 도는 너

골든레몬타임 이야기

by 정벼리

동생과 나는 같은 부모 슬하에서 삼시세끼 같은 밥을 먹고, 한 방의 이쪽과 저쪽에 침대를 두고 함께 잠들고, 아침마다 서로 옷을 뺏어 입으며 자랐다. 그럼에도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동생은 키가 크고, 널찍한 어깨를 가졌고, 어려서는 한글과 구구단을 깨치기까지 상당한 고난을 겪었지만 고등학교 때부턴 공부를 곧잘 하여 이과로 진학을 하더니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고, 현재는 자기 사업을 하며 매년 흰머리를 늘려가고 있다. 나는 키가 작고, 어깨도 좁고, 어려서는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한글과 구구단을 스스로 깨치더니, 고등학교 때부턴 공부하기 싫어서 눈물을 훔치며 문제집을 풀었고, 뼛속까지 문과이며, 어떻게든 영원히 피고용인 신분을 유지하고자 기를 쓰고 있다.


바깥으로 비치는 모습도 이토록 다르지만, 내가 동생을 두고 '쟤는 나랑 정말 다른 사람이구나' 소름 돋게 실감했던 계기는 보다 사소한 일이었다. 우리가 아직 한 집에서 함께 살던 어느 날, 동생은 무슨 일 때문인지 깊은 우울감에 빠져있었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을 거야. 기운 나게 내가 맛있는 것 좀 만들어줄까?"


그리고 동생이 답했다.


"아니. 스트레스 받아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겠어."


나는 심한 충격에 휩싸였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맛있는 것을 먹어서 해소를 하는 것이 진리 아니야? 스트레스 때문에 먹을 것을 못 먹는다고? 아니 왜?


세상에는 다양한 기준에 따른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어떤 기준은 회색지대가 좀 넓고, 어떤 기준은 좁다. 스트레스를 받은 상황에서 먹느냐 마느냐는 회색지대가 거의 없이, 상당히 명백하게 인간을 두 종류로 분류해 낼 수 있다. 그러니까 내 동생은 기준선의 저 편에 서있고, 나는 이쪽에 있는 것이다.




슬프거나, 괴롭거나, 외롭거나, 아프거나, 우울할 때면 우선 잘 먹고 봐야 한다. 세상에 맛 좋은 음식은 많고 많지만, 역시 부정적 감정에는 약간의 상큼함을 끼얹으면 상당한 중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추천하는 상큼함은 골든레몬타임, 달콤한 레몬향이다.


향신료로는 골든레몬타임 하나면 따봉이라니까


여기, 눈물 따위 싸악 말려주는 상큼하고 푸짐한 밥상을 소개해본다.


우선 베란다로 나가 싱싱한 골든레몬타임을 몇 줄기 수확해 온다. 벌써부터 향기가 코를 스치며, 입맛이 싹 돌 것이다. 깨끗이 씻은 골든레몬타임 줄기 중 절반은 잎만 따로 떼어 둔다.


냉장고에서 신선한 채소들을 한 줌 꺼내 샐러드용으로 손질하고, 오이도 어슷 썰어 준비한다. 방울토마토도 서너 개 잘라둔다. 드레싱으로는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3T에 화이트 비네거 1T을 넣고, 곱게 다진 골든레몬타임 1t(잎만 따로 떼어 둔 것을 사용한다), 메이플시럽 1/2t, 다진 마늘 약간, 소금과 후추도 적당히 섞어둔다. 아직 채소에 뿌리지는 말고, 한쪽에 곱게 모셔두자.


충분히 달군 팬에 식용유를 두른 뒤, 앞뒤로 소금 후추를 넉넉히 바른 스테이크용 살치살을 한 덩이 올려 굽는다. 한 면에 1분 30초 정도 정도 충분히 굽고, 뒤집어 반대편도 구워준다. 이제 불을 중약불로 줄이고, 버터, 다진 마늘, 골든레몬타임 몇 줄기를 넣는다. 버터가 녹아 기름과 섞이면 팬을 살짝 기울여 녹은 버터를 숟가락으로 떠서 고기 표면에 반복적으로 끼얹는다. 1분 정도 반복한 뒤 반대편에도 동일하게 끼얹어준다. 불을 끄고 고기를 꺼내 도마에 올려, 포일로 살짝 덮어 5분 정도 레스팅을 한다.


그 사이에 테이블을 세팅한다.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하나 돌리고, 밥이 돌아가는 동안 찬장에서 가장 예쁜 그릇을 아낌없이 꺼내자. 손님맞이에나 쓰이는 넓은 접시면 더욱 좋겠다. 한 귀퉁이에 준비한 샐러드거리를 소복이 담는다. 데워진 밥도 동그랗게 모양내어 샐러드 옆쪽으로 예쁘게 담는다. 그리고 레스팅이 끝난 살치살 스테이크를 쓱쓱 썰어 접시의 나머지 부분에 올려준다. 혹시 남은 골든레몬타임 가지가 있다면, 고기 위에 엑스자로 교차하여 데코로 올려도 좋다.


자, 이제 맛있게 먹어보자.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고 나면, 기분도 나아지고 다시 힘이 날 것이다. 흰쌀밥에 살살 녹는 고기, 아삭아삭 채소를 먹는 내내 은은한 레몬향이 혀 끝을 탁 치며 기운을 불어넣어줬으니, 분명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언젠가 짜치게도 눈물 한 방울 참을 수 없는 날이 온다면, 꼭 한 번 드셔보시길.




타임은 인류가 가장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허브 중 하나이다. 기원전 2,800년 경 이집트에서 사용된 기록이 있다고 한다. 타임(Thyme)이라는 이름은 용기 또는 힘을 뜻하는 그리스어 thymos에서 유래되었다고 이야기된다. 그래서 중세에는 귀부인들이 수놓은 손수건에 타임 가지를 꽂아 기사에게 건네며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했다나.


타임 중에서도 골든레몬타임은 달콤한 레몬향을 강하게 풍기고, 잎의 가장자리가 금빛으로 물들어 특유의 무늬를 뽐낸다. 그래서 이름에 골든레몬이 붙었나 보다. 아주 작은 잎이 마주나고, 다 커봐야 키도 20~3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정원의 가장자리를 따라 심어두기도 하는데, 어쩌다 줄기가 밟히면 순식간에 향기가 코끝을 맴돈다고 한다. 향신료로서 골든레몬타임은 육류나 생선의 잡내를 없애고 풍미와 감칠맛을 더해준다. 고기요리 외에도 샐러드, 소스, 음료수 등 다양한 음식에 사용된다. 특히 차로 우려내 마시면, 두통을 없애주고, 숙면과 소화를 돕는다.


인간의 오감 중에 오직 후각만이 뇌의 시상을 거치지 않고, 후각 신경을 통해 곧바로 대뇌 번연계에 도달한다고 한다. 대뇌 번연계는 감정과 기억, 행동을 담당하는 영역이다. 그래서 냄새는 다른 감각보다 더 강렬하고 즉각적인 감정반응을 일으킨다. 향기는 이토록 힘이 세다.


식집사로 살아온 지난 20년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단언컨대, 이런저런 허브향은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지만 시트러스 계열의 향기에 미소 짓지 않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골든레몬타임, 아, 향기 진짜 좋은데. 한 번 맡아보면 누구나 입가에 웃음이 씩 돌고, 입맛도 싸악 돌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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