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토니아 레드스타 이야기
너를 나에게 건넨 사람은 몇 년 전 함께 근무했던 K였어. 털털한 웃음을 달고 사는 K는 그날 예고 없이 나를 찾아왔지. K를 만나는 건 꽤 오랜만이었고, 그가 갑자기 나를 찾을 별다른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나에게 K는 얼굴 한가득 특유의 웃음을 퍼뜨리며 쑥스러운 듯 작은 화분 두 개를 내밀었어. 조금은 시들한 핑크잎이 소복이 심겨있었어. 너와 네 형제였지. K는 아내와 길을 걷다가 너희를 발견했다면서, 색이 예뻐 사들고 왔는데 어떻게 해도 자꾸만 시들어간다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어. 저라고 시들어가는 식물을 다 살려낼 수 있는 건 아닌데요,라며 난감해하는 나에게 K는 한술 더 떠서 답했지. 어차피 저는 곧 죽일 것 같으니 그냥 맡아서 키워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말이야. 엉겁결에 화분을 받아 들고마주 앉아 소소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나는 K에게 네 이름을 물었어. 세상에, 너도 기억하니? K는 낄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지. 화원에서 뭐라고 했는데, 까먹었어요. 나 원 참. 정말 엉뚱한 사람이야.
나는 너와 네 형제를 밝은 창가에 내놓았어. 어떤 식물들도 잘 자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는, 정남향의 큰 창가였어. 쨍한 태양빛이 가득 차고, 바람도 솔솔 통하는 그곳에 두면 알아서 튼튼해지리라고 나는 아주 안일하게 생각했던 거야.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이 지나도 너희는 지친듯한 잎을 번쩍 들어 올릴 생각을 하지 않더라고. 오히려 자꾸만 잎이 바래고, 끄트머리는 갈색으로 시들어갔지. 물이 좀 부족한가 싶어 물 주는 주기를 조금 당겨보았어. 그래도 큰 변화는 없더라. 혹시 뿌리가 꽉 차서 숨 쉴 틈이 없나 싶어 분갈이도 해줘 봤지. 웬걸. 내가 물을 너무 많이 주었었는지 오히려 뿌리에 과습이 왔던걸. 화분을 꽉 채우긴커녕 얼마 되지도 않는 뿌리마저 상한 부분을 잘라내주어야 했어. 새 화분에, 새 흙에 심어주어도 너희 상태는 그저 그랬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고, 괜히 K는 나한테 너희를 맡겨서 골치가 아프다고 투덜거렸어.
무정한 불평을 들은 걸까. 분갈이 몸살을 이겨내지 못하고 네 형제는 어느 날 그만 영영 시들어버리고 말았어. 되게 속상하더라고. 역시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한 채 계속 어딘가 마르고 축 쳐진 너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는 너를 창틀에서 내려버렸어. 어쩌면 처음부터 병든 아이들이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병든 모종을 팔다니 아주 양심 없는 화원이라며,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욕하기도 했지.
너도 기억하지? 내가 너를 내려놓은 바닥에는 빈 화분이 몇 개 겹쳐 놓여있었잖아. 솔직히 털어놓자면, 나는 너를 눈에 잘 띄지 않는 바닥에 내려두었다가, 영영 시들면 미련 없이 화분을 비워버릴 심산이었어. 그런데 우스운 일이지? 바닥에 내려놓은 이후로 너는 점점 기운을 차려가는 것처럼 보였어. 뒤늦게 나는 깨달았어. 너는 내리쬐는 강한 태양빛이 너무 버거웠던 거야. 나는 너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지. 부랴부랴 나는 밝은 간접광이 드는 원형 테이블 위로 옮겨 주었어. 시간이 지나면서 너는 확실히 힘이 생겨나더라. 그래도 끄트머리가 갈변하는 잎이 자꾸 생겨났지.
나는 이제 나의 무지와 무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모르고, 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이야.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건 그저 쨍한 핑크 잎과 화려한 잎맥의 무늬,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뿐이었지. 생각해 보면 나는 그때까지 네 이름도 모르고 있었던 거잖아. 그러고보니 K가 네 이름을 잊어버렸다고 웃을 일이 아니었네. 나 역시 네 이름을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너는 휘토니아 레드스타. 너무 강한 햇빛은 견디지 못해 잎이 손상되고, 반음지에서 잘 자라지. 하지만 또 빛이 너무 부족하면 훌쩍 웃자라버리니 어느 정도는 충분한 광량이 주어져야 해. 추위에도 더위에도 취약해서, 18~25도의 적정 온도를 유지해주어야 하고 말이야. 겉흙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고, 촉촉한 흙을 유지해주어야 해. 하지만 배수가 잘 안 되면 뿌리가 과습으로 썩어버리니, 보습력은 갖추되 배수는 원활한 토양상태를 만들어주어야 하지. 약한 통풍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너무 강한 바람을 맞게 해서는 안 돼. 그 이유는 습도 때문이야. 너는 높은 습도를 좋아해서, 테라리움으로 꾸며주거나 습기를 유지하기 위한 유리돔을 씌워주는 것이 권장된다고 하더라.
와. 세상에나. 나는 정말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 뭐야. 무지 속에 떠나보낸 네 형제에게 뒤늦게나마 깊은 사과를 전하고 싶어. 그 어느 것 하나 자신에게 맞지 않는 환경 속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데, 원래부터 병든 아이였을 것 같다며 투덜대기만 할 뿐 적당한 보살핌은 주어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서러웠을까.
나는 너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며주었어. 일반적인 상토보다 펄라이트를 조금 더 많이 섞어 배수가 잘 되는 흙을 채운 토분에 심어주고, 화분받침은 깊고 넓은 남색 유리 볼로 대체했지. 볼 안에는 동글동글 귀여운 현무암 자갈을 고르게 깔아주었고 그 위에 화분을 올렸어. 자갈이 반쯤 잠길 정도로 늘 찰랑찰랑 물을 채워두었어. 적어도 네가 숨 쉬는 반경에서는 적정 습도가 유지될 수 있도록 말이야.
그 뒤로 너는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도 자랐어. 갈변한 잎도 없어지고, 이파리 끝까지 선명한 무늬를 날카롭게 뽐내고 있어. 어느새 화분이 가득 찰 정도로 무성해졌고 말이야. 이제야 너를 조금 알 것 같아. 무척이나 예민하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