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아이스 이야기
겨울 코트를 꺼낼 무렵이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연중 과제가 있으니, 바로 크리스마스 장식이다. 이미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면, 크리스마스 시즌의 시작은 이르면 이를수록 옳다는 개똥 지론을 가지고 있다. 어차피 한 번은 창고에서 소품들을 꺼내와 낑낑대며 달고, 세우고, 꾸미게 될 것인데 빠르게 장식할수록 오래오래 반짝임을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올해도 우리 집은 한참 전부터 커다란 트리에 새빨간 오너먼트를 가득 달고, 창가에 겨우살이 장식을 늘어뜨렸다. 밤마다 반짝반짝한 조명을 켜놓고 조금은 때 이른 연말 분위기를 실컷 즐기고 있다. 혹시라도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가실 때를 대비해 커다란 대왕 양말도 척 하니 매달아 두었다.
아, 산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산타의 실체를 알게 된 날의 상실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크리스마스가 정말 좋았다. 빛나는 크리스마스 장식은 언제나 심장을 두근두근하게 만든다. 어딜 가나 흥겨운 캐럴이 울려 퍼지는 나날들이 흐르고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엄마아빠는 매년 빨간 썰매장식이 올라간 케이크를 준비해 주었다. 다 함께 촛불을 불어 끌 때면, 마치 모두가 주인공인 축제 같았다. 게다가 밤중엔 산타 할아버지가 아무도 몰래 다녀가곤 했다. 머리맡에 놓여있던 선물은 매년 어쩜 그렇게도 내 취향에 찰떡콩떡인지 몰랐다. 특별히 대단하게 착한 어린이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지만, 산타 할아버지는 그저 잘했다, 잘했다 칭찬하며 나를 잊지 않고 찾아주시더라. 우리 할머니만큼이나 너그럽고 좋은 양반이라고, 어린 마음에도 감복하며 감사히 선물을 뜯었더랬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그맘때 피아노 학원에서는 다들 캐럴집을 연주하고 있었다. 오만 캐럴이 뒤섞인 뒤죽박죽 음표를 배경으로 친구와 재잘재잘 떠들다가 산타 이야기가 나왔다. 산타 할아버지는 매년 내 마음을 딱 알아준다며, 올해는 어떤 선물을 주시려는지 기대가 된다고 하자 친구는 폭소를 터뜨렸다.
"야, 정벼리. 산타가 세상에 어딨어? 그거 너네 엄마 아빠가 사다 준 선물이야. 이 바보야!"
와, 나 진짜 어이없어. 살다 살다 별소리를 다 듣는다. 산타가 왜 없어? 우리 엄마아빠도 매년 내가 받은 산타 선물 보고 깜짝 놀라면서 같이 뜯어보는데. 그럼 우리 엄마 아빠가 자기가 사 온 선물을 보고 깜짝 놀라는 바보냐? 진짜 황당하네. 네가 그렇게 거짓말을 해대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너한테는 선물 안 주는 거야. 좀 착하게 살아.
나는 신념에 불타올라 화를 냈다. 옥신각신 싸우고 집에 돌아온 뒤에는 저녁 준비를 하는 엄마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마저 분통을 터뜨렸다. 산타가 없다고 하다니, 걔 진짜 나쁜 아이인 것 같다고, 산타 선물도 못 받는 거짓말쟁이랑 계속 놀아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며 혀를 찼다. 조용히 듣고 있던 엄마는 갑자기 국자를 손에 쥔 채로 나를 향해 휙 몸을 돌리고 말했다.
"벼리야, 산타는 없어. 사실 그동안 네 동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엄마 아빠가 선물을 사다 놓고 놀란 척을 한 거야. 이제 너도 어느 정도 컸으니 알려주는 거야. 너만 알고 있고, 네 동생은 아직 어리니까 비밀을 지켜줬으면 좋겠다."
어버버 하며 엄마 말대로 동생에게는 비밀을 지키겠다 약속하고 돌아서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방에 틀어박혀 눈물을 찔끔찔끔 짜냈다. 세상에, 산타가 없다니. 어떻게 산타가 없을 수가 있어? 어떻게 세상이 나한테 이래? 해일처럼 덮쳐오는 공허한 상실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어린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화산재에 뒤덮여 사라진 폼페이처럼, 나의 한 시대도 그렇게 갑작스럽게 영영 잃어버려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크리스마스가 좋다. 일 년의 1/6은 플레이리스트를 온통 크리스마스 음악으로 채우고, 어디든 크리스마스 리스를 달지 못해 안달한다. 크리스마스 식기를 꺼내 쓰는 동안은 보리차마저 새하얀 고블렛잔에 따라 마신다. 한동안 매일매일 특별한 날, 특별한 시즌을 보내고 있다는 특별한 기분이 나를 끝없이 들뜨게 한다. 이건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아닌 크리스마스에만 가능한 일이다. 생각해 보라. 어떤 기념일이라도 수 주 전부터 이제 시즌이라며 매일같이 들뜨는 건 좀 이상하잖아. 크리스마스에만 통용되고 용인되는, 묘하게 지속되는 이 축제 분위기가 좋다.
올해도 시즌이 찾아왔으니, 베란다 식물정원의 배치를 살짝 바꿔주어야 한다. 저어기 안쪽 창문 바로 앞에, 다른 친구들 뒤에 숨어 지난 계절동안 오로지 게으르게 햇빛만 듬뿍 받고 있던 블루아이스를 데려와 센터에 세운다. 이 시즌엔 오디션도 필요 없다. 그냥 한동안은 블루아이스가 확신의 센터상이요, 살아있는 눈의 여왕이다.
블루아이스는 애리조나 사이프러스 계열의 상록수이다. 은회색 빛이 도는 푸른 잎을 가져, 마치 잎 표면에 하얀 눈이 얼어붙은 느낌을 준다. 수십 미터의 침엽수가 빽빽한 깊은 숲 한가운데에 들어온 듯한 짙은 향기도 풍긴다. 침엽수류 중에 피톤치드 발산량이 가장 높은 탓이다. 별다른 전정 작업 없이도 스스로 원뿔형 트리 모양으로 잘도 자란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어디선가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엘사 여왕이 나무사이를 헤치고 나와 눈부신 얼음 결정을 흩뿌려줄 것 같은 느낌이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다.
겨울의 센터요정이 다른 계절에 내내 게을리 태닝만을 즐긴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블루아이스의 신비한 색은 햇빛을 통해 생성된다. 블루아이스를 만져보면 끈끈한 왁스 성분이 묻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얀 가루 같은 큐티클 왁스층인데, 이것이 빛을 받아 산란시키면서 우리 눈에는 은회색 또는 은청색으로 비치는 것이다. 이 왁스층은 사실 자외선으로부터 나무 스스로를 보호하고, 강한 햇빛에 건조해지는 환경에서 수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에 해당한다. 양지에서 자라는 블루아이스는 그래서 건조에 강하다. 물 주기에 있어서만은 살짝 무심한 듯 키우는 것이 좋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너무 거창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연말의 축제 분위기를 내고 싶다면 블루아이스를 하나 들여보는 것도 좋겠다. 작은 오너먼트 서너 개만 걸어두어도, 그 자체로 살아있는 반려 트리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