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엘리아 데보시아나 이야기
대표실에 직접 보고를 들어갈 일이 생기면, 아무리 시간을 맞춰도 몇 분 정도 부속실에서 순서를 기다리게 된다. 단정하게 정리된 순백의 공간에서 대기하는 일은 아무리 반복되어도 편안하지만은 않다. 가끔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 때에는 곳곳에 놓인 화분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낸다. 부속실 직원 L은 무표정하고 무뚝뚝한 편인지만 화분에는 퍽 애정 어린 정성을 쏟아 관리하는 모양인지, 언제나 깔끔하고 싱싱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대개 취임 선물로 들어온 화분들을 관리하는 것이니 특별히 색다른 종류가 있지는 않다. 호접란, 벤자민, 뱅갈 고무나무, 인삼팬다 등등.
그런데 어느 날, 큼직하고 빳빳한 잎사귀들 사이에서 수줍고 여리여리한 귀여운 풀 하나를 발견했다. 잔털이 돋은 작고 동글동글한 잎사귀는 벨벳처럼 매끈하면서도 보드라웠고, 잎사귀 하나하나마다 잎맥을 따라 흐른 흰 줄무늬가 오묘했다. 줄기가 이리저리 엉켜 구불구불 자라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덩굴성 식물이라 한 줄기 잘라가서 물에 톡 꽂아놓으면 뿌리가 날 것 같은데. 그래도 주인 허락 없이 줄기를 꺾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아, L에게는 정말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말 걸지 않는 편이긴 한데. 한동안을 망설였지만, 식물을 향한 궁금증이 인간을 향한 불편함을 끝내 이겨버리고 말았다.
"저, 이 화분에 심긴 식물 이름이 뭐예요?"
"잘 모릅니다."
단답형 대답에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짜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말을 걸어보았다. 한 줄기 잘라가도 될지는 물어보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가꿔놓은 모양이 꽤 정성을 들이신 것 같은데. 생긴 게 예뻐서 궁금해서요."
"나무 화분 아래 심겨 있던 것을 옮겨 심은 거라 이름은 잘 모릅니다."
L은 저 대답을 끝으로 시선을 모니터로 옮겨버렸다. 살짝 민망해지려고 하는 찰나에, 저쪽에 서있던 S부장님이 다가와 말했다.
"이거 딱 보니 땅콩이여. 생긴 게 땅콩 잎사귀구먼."
"아, 땅콩이 이렇게 생겼어요? 전 처음 봐서요."
"으이. 땅콩이여. 땅콩도 요렇게 심어 노니 그럴싸 허네."
아까는 그렇게 한 줄기 꺾어가고 싶은 욕심이 나더니, 잎사귀의 정체가 땅콩이라고 하니 급격하게 시시하게 느껴졌다. 흥미가 식었다. 땅콩 화분은 그렇게 기억에서 사라졌다.
잊혔던 땅콩잎을 다시 조우한 것은 몇 달 전이었다. 오랜만에 화원에 들러 관엽 포트 사이를 누비며 식물을 구경하고 있는데, 부속실에 있던 그 땅콩잎이 눈에 보이는 거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럼 그렇지, 얜 절대로 땅콩이 아니야. 나는 냉큼 포트를 집어 들고 사장님에게 달려갔다.
"사장님, 얘 이름이 뭐예요?"
"거 안 쓰여있어요? 잠깐만요."
사장님은 포트를 들고 안쪽으로 들어가 화분을 돌보는 분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더니, 휘갈겨 쓴 메모지를 하나 들고 나오셨다. 루엘리아 데보시아나. 땅콩 잎의 정체가 밝혀졌다. 사장님은 메모지를 건네며 덧붙였다.
"브라질 페튜니아라고, 페튜니아 꽃의 일종이래요. 잘 키워서 꽃을 피우면 이쁘겠어요."
그렇게 나는 루엘리아 데보시아나를 손에 넣고 말았다.
알고 보니 루엘리아 데보시아나에 대한 오해는 땅콩 하나만이 아니었다. 루엘리아 데보시아나가 브라질 야생 페튜니아(Brazilizn Wild Petunia)라는 영어 일반명으로 불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페튜니아와는 식물학적으로 거리가 멀다고 한다. 페튜니아는 가지과에 속하는데, 이 아이는 쥐꼬리망초과의 여러해살이 풀로 그저 꽃의 모양이 페튜니아와 비슷해 보여 그런 별칭을 얻게 된 것뿐이었다.
이제 루엘리아 데보시아나는 제 이름을 찾고, 하얀 무광 도자기 화분에 심겨 자라나고 있다. 부속실에서는 덩굴성 줄기가 더 돋보였는데, 아마도 햇빛이 부족해 조금 웃자란 모양이었나 보다. 우리 집에서는 잎이 보다 빽빽하게 돋아 풍성한 모양새가 나오고 있다. 다 크면 40~50cm 정도로 자라난다고 하니, 한번 크게 키워볼 요량이다. 멋지게 커나갈 루엘리아 데보시아나를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두근,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