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세나 마지나타 이야기
으른(주의-어른 아니고 으른)이 된다는 것은 사람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는 일이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 잘 차려진 백반 일 인분을 주문해서 느긋하게 식사를 마친다든지, 샤워 후에 루틴처럼 화장실 배수구에 낀 머리카락을 쓱쓱 닦아 치운다든지, 옷가게에서 저는 95 사이즈가 품이 딱 맞지만 소매를 조금 줄여야 할 테니 길이를 잡아주시겠어요, 하고 우아하게 부탁할 수 있다든지. 스스로가 으른처럼 느껴지는 순간은 때로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서 오히려 이상한 느낌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당신은 언제 스스로가 으른이 되었다는 오싹함을 느끼는지. 나는 누군가에게 화분 선물을 보낼 때 주로 오싹오싹하더라.
내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화분을 선물한 것은 친구 K가 개업을 하던 날이었다. 우리가 사회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K는 실무를 어느 정도 익히자마자, 용감하게도 함께 졸업한 동기들 중에 가장 먼저 자기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운 좋게도 K가 차린 사무실은 내가 근무하고 있던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았고,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개업날 그녀의 사무실을 방문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개업을 축하하는 것은 머리털 나고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그날의 경망스럽고도 포근한 기억은 아직도 어제 일인 듯 생생하다.
나는 꽃집을 찾아 잎이 빤들빤들한 동양란 화분을 구매했다. 진녹색의 이파리 사이로 하얀 꽃이 달린 꽃대가 우아하게 솟아있었다. 꽃집 사장님은 품종이 어쩌고, 화분이 어쩌고 설명을 해주었지만 고작 이십 대 중반 젊은이가 뭘 알아들을 리가 있나. 그냥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장님은 핑크색 리본을 꺼내와 뭐라고 써주면 좋을지 물어왔다. 이런 걸 보내봤어야 알지. 그냥 개업식에 무난히 어울리는 말을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사장님은 손수 붓펜을 들고 "開業을 祝賀합니다."라는 아주 평범한 말을 멋들어지게도 적어 내려갔다.
리본이 꽂힌 난 화분은 사회초년생에게는 살짝 충격적일 만큼 비쌌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으려 애를 쓰며 카드를 내밀었다. 서로 주머니 사정 빤한 사이인데 차라리 돈으로 주는 게 현실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언제 또 K에게 화분을 선물할 일이 있겠어. 조심조심 화분을 끌어안고 K의 사무실로 향했다. 발걸음이 경쾌했다. 자꾸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품 속의 비싼 녀석에게 마음으로 속삭였다. 내 친구 성공하라고 네가 좋은 기운 잔뜩 풍겨줘.
K는 평소 만사에 무던하고 기복이 없는 성품이었는데, 그날만큼은 한껏 들떠 있었다. 사무실은 크지 않았지만 깨끗하고 단정했다. 별다른 기교 없이 밝고 우직하게 꾸며져 있었다. K는 내 손을 잡아끌며 동생과 심혈을 기울여 골랐다는 커다란 책상과 소파, 협회에서 받았다는 촌스럽고 묵직한 명패, 아빠가 직접 목재를 떼와 몇 날 며칠 끙끙대며 작업해 주었다는 두툼한 몰딩, 엄마가 손걸레로 구석구석 닦아냈다는 창틀까지 작은 사무실의 정말 모든 것을 구경시켜 주었다. 보이는 것마다 나는 끊임없이 엄지를 척척 올려붙였고, 우리는 마주 보고 깔깔 웃었다.
나는 사무실 한가운데 응접 테이블에 내가 사 온 동양란 화분을 올려놨다. 아주 그럴싸했다. 이게 얼마나 비싼 것인 줄 아냐고, 잊지 말고 물을 주라며 화분을 죽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으름장도 함께 내놓았다. 그리고 점심으로 피자를 시켜 먹었다. 사무실을 나서며 K를 꼭 끌어안았다. 꼭 잘 될 거야.
그 뒤로 결말은 당신이 예상하는 그대로다. 비싼 동양란은 몇 달도 되지 않아 바사삭 말라죽었고, 다행히 죽기 전에 제 소명은 다 하고 갔는지 K의 사무실은 십수 년째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화분을 죽인 뒤 K는 나에게 욕을 한 바가지 먹었고, 다시는 너한테 화분을 보내지 않겠다며 투덜거렸지만 그 뒤로도 결혼이나 새집마련 등 K에게 축하할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몇 번 더 화분을 보냈다. 다만, 아주 키우기 쉬운 녀석들로.
그중 하나가 드라세나 마지나타이다. 드래곤 트리라고도 불리는 멋진 관엽식물이다. 가늘고 긴 잎이 사방으로 휘어지며 가늘고 정돈된 곡선을 드러낸다. 잎만 보면 동양란처럼 우아한 여백의 미가 엿보이지만, 드라세나 마지나타는 나무처럼 굵은 목대를 가지고 있다. 잎 끝의 붉은 테두리가 현대적이고 화려한 느낌을 더한다. 동양란의 고고한 기품에 이국적인 색채와 나무의 형태가 더해진 식물이라고나 할까. K에게뿐만 아니라, 선물로 보내는 난 화분을 보다 캐주얼하게 대체하기에 이만한 녀석이 또 없는 듯하다.
공기정화능력도 뛰어나고, 키우기는 또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키울 때 주의사항이라고 특별히 꼽을만한 것이 없다. 겉흙이 마르면 충분히 물을 주기. 상식적인 관리만으로도 푸르른 싱그러움을 가득 전해준다. 다만 고향이 마다가스카르라 냉해는 주의해야 한다. 13도 이상의 온도만 유지해 주면 된다고 하니, 일반적인 거실 창가에만 위치하면 사시사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어느새 노안을 걱정할 나이가 되었다. 난 화분을 끌어안고 K의 사무실을 향하던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여러 사람에게 무수히 많은 화분을 선물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십수 년 전 그날만큼의 설렘과 즐거움을 다시 느껴본 적은 없는 듯하다. 화분을 보내는 일이 능숙한 으른이 된 나는 이제 주로 인터넷 사이트에서 클릭 몇 번으로 주문을 마친다. 리본 문구도 큰 고민 없이 착착 기재한다. 영전을 축하합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새로운 출발을 응원합니다, 꽃길만 가득하세요... 그래도 전하는 마음만큼은 여전히 진심을 가득 담고 있다. 푸르게 전해지는 인사에 받는 이가 꼭 행복해지길,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