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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보물의 보물

개운죽 이야기

by 정벼리

한동안 집에 화분이 없었다. 신혼집 거실에는 백여 개의 화분을 이리저리 배치하여 흡사 미니 정글 같은 모양새였는데, 하루아침에 전부 치워버렸더랬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몸을 뒤집고, 되집고, 이어서 배밀이를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나는 키우던 식물 사진을 하나하나 찍어서 지역 맘카페에 올렸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키우던 화분 무료 나눔 합니다.
아이가 곧 기어다닐 것 같아서, 한동안 화분을 키울 수 없을 것 같아요.
정성껏 키워주실 분을 찾아요.


채 이틀도 되지 않아 그 많은 화분은 동네 이 집 저 집으로 모두 보내졌다. 꽤나 값나가는 토분을 한참 모았던 터라, 하나하나 보내면서 속은 좀 쓰렸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순간이라도 눈을 떼면 찰나에 아이가 어찌 되기라도 할까 봐, 볼일을 보며 화장실 문도 닫지 못하던 초보엄마 시절이었다. 못 보는 새에 식물 잎사귀라도 뜯어먹으면 큰일이고, 화분을 뒤엎어도 큰일이고, 혹 깨진 화분 조각에 아이가 다치는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 내 보물을 위해서라면 뭐든 포기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신혼시절 애정을 듬뿍 쏟았던 화분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한동안 집에서는 화분을 기르지 않았다. 다시 집에 화분을 들인 것은 몇년 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비실비실한 토마토 모종을 하나 받아오면서부터였다. 열매가 열릴 때까지 키워서 빨간 토마토 열매를 수확하는 사진을 찍어가는 것이 무려 '숙제'라고 했다.


"풋. 토마토 그까이꺼 껌이지. 엄마만 믿어! 이 엄마가 한 때 거실을 밀림으로 만들고 지냈다, 이거야!"


해가 가장 잘 드는 자리에 토마토 모종 포트를 올려두었다. 토마토 모종은 쑥쑥 키를 키우더니 이내 꽃이 피었다. 나는 면봉을 가져와 꽃들을 열심히 문질러 주었다. 인공적으로 수분을 시켜 열매를 맺게 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토마토 열매는 맺히지 않았다. 며칠 뒤 꽃은 그대로 시들어버렸다. 숙제를 못하게 되었다며 아이는 슬피 울고, 나는 몹시 당황했다. 마침 우리 집에 와계시던 엄마 아빠는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작물 열매 맺는 게 어디 햇빛만 든다고 되는 일인 줄 아냐. 이거 영 웃자라서 열매 못 맺는다. 순지르기 해서 영양분이 모이게 해줬어야지."


지금이라도 해주면 되지 않겠냐며 적당한 높이에서 줄기를 뎅강 잘라보았지만, 토마토는 영영 열리지 않았다. 엄마가 잘 키워준다고 했으면서 이게 뭐냐고 입이 댓발 나온 아이를 데리고 나는 화원을 찾았다. 엄마가 열매는 못 맺어도 잎은 푸르게 잘 키운다며, 여기서 네 맘에 드는 것 다 골라오면, 이번엔 진짜 엄마가 푸르게 푸르게 키워준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렇게 우리 집 실내정원은 약 3년만에 다시 부활했다.



얼마 전 아이는 학교에서 조그마한 개운죽 화분을 들고 왔다. 작은 유리병에 색자갈을 깔고 키 작은 개운죽 두 줄기를 수경재배로 심은 것이었다. 교실에서 1인 1화분 기르기 활동으로 매일 스스로 물을 주고 가꿔온 것이라며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엄마, 얘네 이름이 뭐게?"
"에이! 엄마는 당연히 알지. 이거 개운죽이잖아."
"아니, 그건 이 식물의 이름이고. 얘네한테 내가 이름을 지어줬단 말이야."
"그래? 얘네 이름이 뭔데?"
"왼쪽이 '개운'이고, 오른쪽이 '죽'이야!"


세상에 이렇게 허술한 작명이라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웃음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의기양양하게 개운이와 죽이를 식탁에 떡하니 올려두었다. 다른 화분들이 모여있는 창가에 두지 그러냐는 권유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거긴 엄마 식물이 있는 곳이니, 제 식물은 여기에 두고 매일 본인이 가꾸겠다고 말이다. 그러며 개운이와 죽이는 엄마가 아이를 키우듯 제가 몇 달이나 정성스레 키워온 보물이라고 덧붙이더라.


곧 물 주기를 잊어버린채 말려 죽이는 것은 아닐지 걱정했는데, 역시 부모의 자식 걱정은 지나놓고 보면 대부분 기우다. 아이는 여태껏 한 번도 개운죽 화분에 물 주기를 잊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가끔 물이 탁해지면 화장실로 가져가 물을 비워내고 깨끗한 새 물을 받아주며 제 보물을 잘 관리하고 있다.


내 보물은 4대째 식집사로 거듭나려나.

그것 참 퍽 마음에 드는 가풍이다.


어떤 식집사로 자라나든 너의 화원이 기쁨으로 가득차길. 풍요롭고 아름답길. 건강한 웃음이 크고 널리 퍼져나가길. 그저 행복하기를 마음 깊이 소망해본다.



<식집사일지 vol.1 완결>

그동안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숨 고른 뒤에, 또 다른 식물 이야기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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