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밤 이야기
풀 키우기를 말하며 허브 이야기를 빼놓는 것은 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라벤더, 로즈마리, 민트 등 각종 허브를 키우지만 그중 가장 오랜 시간 함께 해온 이 구역의 터줏대감은 역시 레몬밤이다. 나에게는 9년을 키워온 오래된 레몬밤 화분이 있다.
이 아이로 말할 것 같으면...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조금 쉽게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내가 키우는 화분들을 십 수 명의 자식이라고 가정해 보자. 상투적인 표현으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냐만, 개중에는 유난히 공을 들여야 하는 아이도 있는가 하면 대충 삼시세끼 밥만 챙겨줘도 알아서 크는 아이도 있기 마련일 것이다. 더 아픈 손가락도 있고, 덜 아픈 손가락도 있을 거고. 나에게 레몬밤은 덜 아픈 손가락이요, 대충 내놓고 기르는 자식이요, 엇나가도 결국은 내 품으로 알아서 돌아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아이다.
레몬밤은 꿀풀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로, 이름에서 느껴지듯 잎에서 상큼한 레몬 향을 풍긴다. 허브류 중에도 로즈마리나 라벤더는 오래 키우면 줄기가 목질화되어 굵어지는 관목화를 보이는 것과 달리, 레몬밤은 순수한 풀이다. 아무리 오래 키워도 목대 같은 것은 생기지 않는다. 그래도 정성껏 큼지막하게 키우면 키가 1미터 남짓까지도 자랄 수 있다고 한다. 레몬밤은 허브로서의 효능이 아주 뛰어난 식물이다. 향신료로도 쓰이고, 차로도 마시고, 아로마테라피에도 사용된다.
허브차로 만들어 마시면 레몬향이 머리를 맑게 해 주고, 진정효과가 뛰어나 스트레스와 불안감 해소, 불면증 완화에 효과가 있다. 시중에는 레몬밤 잎을 건조하여 티백 형태로 판매하는 것이 많은데, 레몬밤 화분을 키우고 있다면 굳이 만들어진 티백을 사지 않아도 된다. 신선한 레몬밤 잎을 7~8장 수확하여 깨끗이 씻어 뜨거운 물에 우리면 충분히 좋은 레몬밤 허브차를 즐길 수 있다.
레몬밤은 학명(Melissa officinalis)에 따라 멜리사라고도 불린다. 아로마테라피에 사용되는 오일 중 멜리사 오일이라는 고급 오일이 있는데, 바로 이 레몬밤의 꽃과 잎에서부터 추출한 에센셜 오일이다. 오일을 만드는데 원물이 굉장히 많이 필요해서 가격이 높게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멜리사 오일은 몸이 균형을 찾도록 도와 심리적 이완과 소화촉진, 복통이나 생리통 완화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멜리사는 고대 그리스어로 꿀벌을 뜻한다. 이름에서 눈치챌 수 있듯, 꽃에 꿀이 많아 꿀벌이 많이 모여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 밤(Bee Balm)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양봉가들이 벌을 유인하는 데 사용되었을 만큼 꿀벌이 사랑하는 식물이다. 재미있는 것은 레몬밤 잎을 약용으로 사용하고자 하면, 꽃이 피지 않도록 관리해주어야 한다. 꽃이 피어버리면 줄기는 성장을 멈추고, 잎의 향이 약해지며 품질이 떨어진다.
레몬밤의 꽃은 흰색 또는 연한 청색을 띠고 잎겨드랑이에 작은 무리로 모여서 피어난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까지 레몬밤 꽃을 본 적이 없다. 조만간 강산이 변할 만큼 긴 세월 키워왔지만 말이다. 잎의 효능을 위해 꽃이 피지 않도록 관리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서두에서 밝힌 대로, 나는 레몬밤을 천둥벌거숭이처럼 내놓고 키웠으니 말이다.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향을 즐겼을 뿐, 키우면서 차로 우려마신 일도 손에 꼽는다.
레몬밤을 무심히 키운 것은 순전히 나의 편의를 위해서다. 레몬밤은 땅속줄기를 통해 뻗어나간다. 그래서 작은 화분에서 키우기가 쉽지 않지만, 반면에 물꽂이 번식이 너무나도 쉽다. 매년 무심하게 내버려 두면 푸르름을 한껏 자랑하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저들끼리 얽히고설킨다. 시간이 더 지나면 화분이 뿌리로 가득 차면서 노화된 잎이 검게 말라가기 시작한다. 마른 잎이 잔뜩 생긴다 싶으면, 분갈이 대신에 아직 성한 줄기를 몇 개 댕강 잘라 물에 툭 꽂아 놓는다. 고작 삼사일만에 하얀 뿌리가 돋는다. 뿌리가 난 줄기를 새 화분에 안착시키고, 꺼멓게 시들어가는 본체는 치워버리기를 매년 반복하고 있다.
나의 레몬밤은 그렇게 불사조처럼 영생을 이어가는 중이다. 이제 막 뿌리를 내리고 몸집 좀 불려볼까 하면, 다시 아기로 되돌려버린다. 식물에게도 주체적인 삶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면에서 나는 참 나쁜 보호자일지도 모르겠다. 꽃을 피운다는 것은 후대를 생산하는 소임을 다하겠다는 상징과도 같은 일일 텐데, 나는 레몬밤에게 그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꽃눈을 형성할 만큼 성숙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고, 몇 번이고 생을 강제로 리셋시켜 버리니 말이다.
갑자기 좀 미안해지는데, 내년에는 새로운 시도를 해볼까. 아주 커다란 화분에 옮겨 심고, 하얀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내는 날까지 꾹 참고 기다려봐야겠다. 노화한 검은 잎이 생기면 내버려 두지 않고 똑똑 따서 관리해줘야겠다. 원하는 만큼 실컷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봐. 너에게 꿀벌이 날아드는 순간을 선물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