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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왜 꿈꾸게 되는지

율마 이야기

by 정벼리

현대인으로 태어나서 참 다행이라고, 가끔 생각한다. 과거 그 어떤 시대를 상상해 보아도 나는 언제나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였을 것이다. 신념이라든지 가치라든지 지조, 뭐 그런 고차원적 문제 말고,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 생존의 의미로 말이다.


신분과 계급이 있는 사회에서는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다. 태양왕쯤으로 군림하지 않는 이상, 높은 신분의 사람을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반상의 법도를 지키지 못해 목이 뎅강 잘렸겠지. 유난스런 성격 탓에 말이다. 왜 그럴까, 정말 그럴까, 만약에 이렇다면, 따위의 생각을 멈추지 못하고, 반론할 거리가 있는 한 논쟁을 참지 못하는 기질이다. 아마 분노한 권력자가 저 요망한 주둥이를 영원히 열지 못하게 하라고 고함 치는 것을 끝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까.


더 시간을 거슬러 신분계급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원시시대라면, 그때는 또 새로운 문제에 봉착한다. 신체능력이 너무 형편없어서, 그냥 굶어 죽었을 것 같다. 달리기도 못하고, 겁이 많아 사냥도 못하고, 나무를 탈 능력도 없고, 열매를 발견할 관찰력도 영 꽝이니, 수렵과 채집 그 어느 것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수가 없다. 게다가 잔병치레는 좀 많아야지. 야생에서 살아남을 재간이 없다.


오늘날 내가 최소한의 생존과 안전을 보장받고, 마음 내키는 대로 실컷 지껄여도 목이 뎅강 잘리지 않는 것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지성과 용기가 쌓아 올린 문명과 철학이라는 방패 덕분이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지나왔고, 혁명에서 싹튼 인권과 평등이 어찌되었건 명목상으로는 디폴트값이 된 사회에서 태어난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대사회는 분명 하찮고 약해빠진 나를 보호해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모든 규범과 사회적 질서, 문명과 제도, 책임이 갑갑하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삭막한 도시를 벗어나 자연 속에 머무를 때면 속이 탁 트이는 듯한 해방감이 찾아온다. 아무것도 아니어도 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만이 가득 차오른다. 나만의 청개구리 심보는 아닐 것이다. 일찍이 장 자크 루소도 진정한 기쁨과 평화는 어떤 성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합일을 이루어 본래적 자유를 되찾을 때에 비로소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고작 열 살 난 딸아이도 큰 소리로 외치더라. 규칙은 지긋지긋해, 주말만큼은 나에게 자유를 달란 말이야,라고.


도대체 자유가 무엇이길래, 인간은 누구나 그토록 끝없이 자유를 갈망하는 걸까.


저녁, 센티한 시간, 창가의 율마


인간만의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집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비인간 생물도 있다. 창가의 율마다.


율마는 정말이지 까다로운 식물이다. 햇빛, 물, 통풍이라는 생존에 필요한 조건이 조금만 틀어지면 금세 갈변해 죽어 버린다. 식집사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길, 율마는 온갖 이유로도 죽일 수 있다고 일컫는다. 물이 조금만 말라도 죽고, 햇빛이 조금만 부족해도 죽고, 바람이 조금만 없어도 죽어 버린다. 나무 주제에 이렇게 연약할 수 있을까 싶다. 실내에서 율마를 키우기 위해서는 광량이 충분한 남향 창가에 내놓아야 하고, 물 주기를 강박적으로 살펴야 하며, 상시 바람이 통하도록 창문을 열어두거나 적어도 하루에 1~2시간 선풍기로 인위적 바람이라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유난스럽기가 말로 다할 수 없다.


반전은 집 밖에서 일어난다. 야외에 내놓으면, 율마는 그 어떤 식물보다 튼튼하고 용감무쌍해진다.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잘만 생존한다. 제대로 땅에 심긴 율마는 수십 미터까지도 자란다. 그도 그럴 것이, 율마는 본래 사이프러스 나무의 변종이다. 사이프러스는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상록침엽수로, 잘만 크면 40미터가량의 거목으로 자란다. 워낙에 튼튼한 이 나무는 단단하고 내구성이 뛰어나 옛날부터 목재 건축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도 사이프러스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말이다.


아무래도 실내에서의 율마는 존재론적 회의에 빠지는 것이 틀림없다. 나는 왜 이 좁은 화분에 심겨 마음껏 뿌리를 뻗지 못하는지. 빛나는 태양과 합일을 이루어 반짝이고 싶은데 왜 우리 사이에는 유리창이 존재하여 햇빛과의 접촉을 단절시키는지. 어째서 잎사귀 엽록소 한알까지 시리도록 청명한 바람을 맞지 못하는지. 나는 왜 갇혀 지내야만 하는 것인지. 이것을 과연 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지. 자유를 박탈당한 생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지. 심각하고 심오한 늪에 진득하니 빠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연녹색 율마를 포기할 수가 없다. 부드러운 촉감과, 은은하게 풍기는 옅은 시트러스 향기. 외목대 끝에 촘촘히 자라난 숱 많은 잎이 얼마나 사랑스러운데. 율마를 키우기 위해 들어가는 온갖 노력이 아깝지 않을만큼, 율마에게는 대체불가능한 청량함이 있다. 그래서 오늘도 창문을 열고, 물을 살피며 속삭인다. 잘해줄게. 어려운 고민 따위 내려놓고, 그냥 여기서 행복할 순 없겠니. 내 곁에 오래 머물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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